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7-07-27 조회수 : 170
Red to Blue -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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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캔버라. 정보국(ASD)

캔버라 대사관 마을 미국지역,
각 주재국 관사를 둘러싸고있는 푸른 숲을 밤새 내린 촉촉한 이슬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려 새벽의 숲길을 적시고 있었다.
아침 해는 아직 얼굴을 내밀지 않았고 숲속은 어둠이 채 물러나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아침 잠이 아직은 덜 깬 채로 어제 일어난 일들을 곰곰히 생각해 보며 응웬 뚜이는 다시 한번 가슴을 진정시켰다.
미국 CIA와 호주 ASD는 상호 정보 협조를 위해 담당관들을 교류하는 협력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응웬이 호주로부임한 이후에 ASD를 몇 번 찾지는 않았지만 오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직감은 거의 적중할 때가 많았다.

호주 정보국은 지금 무엇인가를 응웬으로부터 협조 받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응웬 뚜이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CIA분석 요원으로 발탁되어 여자 몸으로 미 육군정보학교를 수석 졸업했다. 그 이후 40여년간을 그녀는 미국을 위해 공산 베트남에 관한 한 전문가로 평가를 받았다.

호주 정보국은 응웬에게 미리 준비한 TV 녹화 영상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한 동양인 남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전부 카메라에 담아 보관하고 있었다. ASD의 보이지 않는 정보 수집망 또한 대단했다.


호주측 담당관이 문제의 녹화 영상을 재생 시켰다.
TV는 머릿발이 히끗히끗한 한 남자의 얼굴을 화면에 크게 떠 올렸다.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은???’
깊은 심연에서부터 아련히 떠오르기 시작한 저 얼굴??? 저 모습???
아~ 아~ 응왠 뚜이는 잠시 동안 자기의 두 눈을 의심했다.

화면에 나타난 저 사람! 아~ 저이는 분명 강철 이었다.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멈추는줄만 알았다.
응웬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지난 40년 동안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던 저사람,
강철(姜鐵) 바로 그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그사람이 바로 TV화면에 나타나 있었다.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변하기는 했지만 젊은 시절 모습이 그대로였다, 안경 벗은 눈 언저리 역시 주름은 가득했지만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과 시원한 눈매는 그대로였다.
응웬은 후들거리는 자신의 몸을 간신히 지탱하면서 호주 정보국 요원의 긴 설명을 용캐도 잘 듣고 있었다.
그들이 응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은 TV속의 이 동양인 남자의 진술이 어디까지가 정확한 진술인지를 알려달라는 것 이다. 베트남에 관한한 응웬 뚜이가 최고의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응웬에게 말했다.
“이미 신문을 보아 잘 아시겠지만, 지난주에 상당히 흥미로운 사건 하나가 시드니 근교 한 주택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한 남자를 조사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바로 TV속의 이 남자는 입니다. 이 남자는한국인으로서 남한 출신인지, 혹은 북한 출신인지를 우리가 확인해야 하며 호주로 오기 전에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도 조사를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TV속의 이 사람의 과거가 북한 정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라는 것이 밝혀져야 이 사람이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사람은 젊은 시절에 베트남에서 연합군을 위해 군사정보 활동까지 했다라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 말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CIA응웬 수사관님이 잘 판단해 주시기 바람니다.”

말을 마친 호주측 수사관은 책상 위의 스피커를 조작해 눈앞 TV 영상과 음향을 일치시켰다. 강철은 TV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진술하고 있었다.
화면속 강철의 목소리가 곧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럼 계속해서 말 하겠습니다. 그시각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 지붕위에 마지막 헬기가 도착했습니다. 그레이엄 마틴 대사를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임무를 완수한 이후, 미 해병대원은 이제 자신들이 탈출할 일만 남았습니다.

그 때가 새벽 5시30분경이었습니다 그 시각,
대사관 정문 앞에는 북베트남 공산군이 쏜 첫포탄이 떨어졌습니다.
건물 주변에서도 소규모의 총격전이 벌어지기 시작해 총소리 또한 요란했습니다.

대사관 지붕위 헬리포터에 착륙해야 할 헬기는 적이 쏘는 포탄과 총격에 놀라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신속하게 해병대원들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명의 민간인까지 함께 태워서 무사히 탈출에 성공 했습니다. 그 마지막 탈출 헬기가 새벽 별이 높이 뜬 하늘 위로 힘겹게 이륙 하는 것을 제 두 눈으로 똑똑히 거듭 확인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헬리콥터에 내 사랑하는 응웬을, 발버둥치는 그녀를 내가 강제로 태워서 보냈기때문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강철의 눈 가장자리는 젖어있었다 그는 눈물을 비췄다.
물기 어린 강철 의 얼굴 모습이 잠시 화면에 크로즈업 됐다.

응웬은 더 이상 TV화면을 볼수가 없었다.
이제 응웬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았다. 두 귀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쓰러지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었다.






23

C I A 와 응웬 뚜이

응웬 뚜이에 대해 미국대사관 직원들 조차도 소수 관계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녀를 뉴욕에서 파견나온 외교관으로 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대사를 비롯해 암호를 다루는 참사관등 2~3명 정도에 불과하다.
60세이상 퇴직할 나이 임에도 아직 일등서기관 직에 머물고 있는 것 은 특별 외교관에게는 연륜과 경륜이 크게 작용한다라는 설명으로 적당히 넘겨졌다.

대사는 모든 영사들이 돌아가며 봐야 하는 서류 중에서도 꼭 필요한 것만 응웬의 책상에 가져다 놓도록 한정하는 특전까지 배풀었다. 가급적이면 일반 업무로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는 배려였다.

지난주 미 대사관에서 개최한 외교단지 리셉션은 성대했다. 각국 대사관 직원들이 초청받아 참석했다.그날 응웬은 외교단지 마을에 있는 주요국가 외교관들을 일일히 소개 받았다.

한국 대사관 정보 요원과도 실무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미국이 우리한국에 대한 협조는 지금 단계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더욱 잘 부탁합니다.”
한국 대사관 소속 요원이 그녀에게 건낸 말이었다.

응웬은 미 대사관 직원이 한국말을 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어 그녀는 영어 이외의 말을 일절 사용치 않았다. 그런데 이 파티에서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자기들끼리 재빠르게 나누는 말들 중에 북한에 대한 정보를 우연히 엿들었다.

그들이 모국어인 한국어로 말하는 대화를 응웬 뚜이는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약간 흥미를 끄는 북한에 관한 정보 내용이 있었기에 이를 즉시 워싱턴에 보고했다.


*


베트남이 공산군에게 함락되던 1973년 4월 그날 새벽,
응웬 뚜이는 강철(姜鐵)에게 이끌려 가까스로 미국 대사관에서 마지막으로 이륙하는 헬기에 구출 되었다. 그녀는 미 해군 수송선으로 옮겨 타 낯선 땅 미국에 홀로 도착했다.
그녀는 곧 난민 수용소에 수용 됐다. 미국 정부가 이들 베트남 난민들에게 우선적으로 비자를 발급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미국 이민성의 개별 인터뷰 때 마다 한국으로 보내 줄 것을 희망했었다. 왜냐하면 한국은 강철 의 고국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한국으로 가야만 강철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한국행을 고집했다.

그렇게 백방으로 노력해 간신히 얻은 주미 한국대사관 영사와 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당신을 받아줄 수 없습니다”라며, 딱 잘라 거절을 당했다. 그는 “베트남에서 우리 한국군 강철 중위가 당신과 약혼을 했었다라는 증거가 없다”라 말했다.
이를 계기로 응웬은 한국보다 힘이 강한 미국에 정착하기로 결심했다.
20살의 응웬이 모국어인 베트남어와 영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강철에게 배운 한국어까지 4개 국어에 능통하다라는 것을 미국 정보담당 관리들은 재빨리 간파했다.

때마침 미 국가안보국(NSA)은 새로운 전자정보 수집시대를 맞아 외국어에 비상한 재주를 가진 장래의 인재를 발굴 육성하는데 주력하던 시기였다.

응웬은 미 육군정보학교를 거쳐 첫 임무에 투입됐다.
최초 임지는 공산화 된 그녀의 조국 베트남 호치민(옛 사이공)시 였다.

그녀가 임무를 띄고 호치민시 근교에 잠입한 곳은 언덕위의 조그만 농가였는데 이미 정보 제공자의 밀고에 의해 북베트남 군인들이 그 농가를 포위하고 있었다.

새벽의 정적을 가르고 울리는 AK 소총의 총성이 응웬의 두 귓가를 어지럽힐 때쯤 그녀는 벌써 농가의 뒷 창문을 뛰쳐나와 있었다.

그리고 언덕아래로 곤두박질치며 굴러내려 나무 뒤에 웅크리고 있는 두 그림자를 향해 응웬은 짧게 총신을 휘둘러 적을 향해 연속 발사를했다. 훈련으로 몸에 익숙해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발사 순간 착탄의 충격으로 두 그림자들이 껑충 허공위로 떠올랐다가 떨어져 내렸다.

아직 총구에서 푸른 연기가 나오고 있는 기관단총을 겨눈 채로 응웬은 군복입은 시체를 내려다 보았다. 둘다 자기 또래의 젋은이 들이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구역질이 난다든가 정신이 멍해진다든가 하는 그런 반응은 전혀 없었다.


공산 베트남에서의 임무를 무사히 끝내고 응웬은 한국 주재요원으로 주한 미국 대사관에 근무를 스스로 자원했었다.
그녀가 한국에 부임한 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된 직후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때였다. 그녀가 워싱턴으로 보고한 최초의 한국 정세 보고서는 이러했다.

“한국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 피격을 유고(有故)로 표현하고 있음. 한국 정부의 최고 각료들이 참석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최규하 총리가 ‘대통령께서 유고십니다’라 표현했고 국방부 장관 노재현이 비상계엄 선포 안건을 상정했으나 다른 국무위원들이 ‘유고의 이유를 밝히라’며 비상계엄을 반대하고 있음. 이런 남한의 혼란 사태가 북한에 알려질 경우를 미국은 대비 해야한다.”

“또한 한국 일부 단체는 한국 대통령을 피살한 배후가 미국(CIA) 에 있다 라는 소문을 퍼트리고 있음. 이를 유념 하기바람. 본부의 다음 임무를 지시바람니다. ”

한국 근무기간 내내 응웬은 강철의 행방을 추적했지만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에는 강철이 베트남 종전 이후로 입국한 흔적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응웬은 한국 근무를 마칠 때쯤 이나 되어 강철이 행방불명됐다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뉴욕으로 돌아온 그 해 그녀는 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애정없는결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년간의 삶을 그럭저럭 보냈으며 헤어짐으로 결혼생활을 마감했다. 둘사이에 아이는 없었다.

그날 이후 오늘까지 그녀는 독신으로 지냈다.

응웬은 회사(CIA)에도 강철의 존재에 대해 비밀로 했다. 강철과의 연애 사실이 알려졌다면 그녀는 벌써 면직 처분을 받았을 것이다. 처음 CIA에 채용될 때 그녀는 모든 채용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녀 자신에 대한 상세한 신상 명세서를 제출했고, 심층 인터뷰를 거쳤으나 강철의 존재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
입사 후 CIA는 매 5년마다 직원 개개인의 신상을 조사했지만 계속 비밀로했다.

CIA가 요원 관리에 있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이 과거나 현재 공산국가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사람과의 개인적인 교제였다.
그녀는 CIA의 이런 규칙을 깨뜨렸다. 입사때의 거짓말을 계속해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
체용될때 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똑 같은 거짓말을 되풀이해 온 셈이었다. 그녀의 첫 사랑은 이렇게 남 모르게 싹 텄고, 남 모르게 비밀로 지켜 져 왔고, 남 모르게 영원히 사랑해야 할 그런 운명적인 사랑이었다.



이른 아침 잠자리 이불 속에서 응웬은 길고도 깊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그녀의 잠재의식이 이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환호했다
“아~ 이제 그이를 찾았다. 나는 그를 찾았다. 나는 강철(姜鐵)을 찾았다.”
환희에 들뜬 그녀는 자리를 털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응웬은 아무도 모르게 강철을 만날 수 있는 작전을 세워야 했다.






24


호주 시드니
정체불명의 추적자 1

두 사내가 지도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블렉타운 골목 길을 숙지하고 있었다.

밀러 장은 앞에 앉은 흑인 사내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일부러 못 박아 말했다.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이번 일은 당신이 혼자서 해야 만 하오.”
“뭐가 문제죠?”
“그 강철(姜鐵)이라는 한국놈은 항상 이 골목을 잘 이용 하죠. 이쪽은 막다른 길이니깐 놈은 늘 이쪽으로 돌아서 나올겁니다. 지금까지 쭉 지켜본 바로는 놈이 두 길을 모두 이용해요. 그런데 이쪽 길은 너무 넓고 사람이 많아요.
따라서 그를 납치할 가장 확실한 장소는 바로 여기, 이쪽 모퉁이가 되죠. 이곳과 이곳은 신호등이 있고 이길은 좁고 길 양쪽에 항상 차들이 주차를 하고 있어요. 이 건물은 아파트고 이쪽은 주택가요. 주택가 근처는 지나는 사람들이 적은 편이죠. 아마 그 시간쯤은 한두사람 정도 지나다닐 그런 시간대예요.”

그는 펼쳐놓은 지도책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상황 설명을 마쳤다. 그런데 갑자기 뭔가를 빠뜨린게 있는 지 “아 참” 하고 말을 계속해 이어 나갔다.

“아 참, 여기 이 주택가는 이곳은 동양인들 집단 거주지역이기 때문에 당신 같은 흑인은 쉽게 눈에 띄게 됩니다. 이점 조심하고 곧바로 덮치시오. 그 강철 제임스 라는 놈은 작은 몸집의 동양인이오. 당신 덩치정도면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꺼요.”

“시간은 틀림이 없습니까?”
“예, 내가 지켜본 바로는 6시면 틀림없이 나타날꺼요. 놈은 4시30분만 되면 유대인의 총포 사격장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사격 연습을 해왔으니까요. 놈을 만나면 단번에 오른쪽 팔을 꺾어 놓으시오. 혹 권총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알겠오. 내 실력을 잘 보여드릴테니 염려 마시오.”
“나는 이쪽 모퉁이에다 차를 세워 놓겠소. 러시아워 때문에 일 하기에는 다소 어려워도 길이 붐벼 혹 경찰이 출동했을 때에 출동 시간이 그만큼 더 걸릴테니깐 우리에게는 더욱 유리하죠. 또 어둡기 전이라 경계심도 없소.”

“다른 장소에서 자동차에 타고 있는채로 그냥 납치해 버리면 더 편하지 않아요?”
백인이 머리를 흔들었다.
“너무 어렵소. 길에 사람이 많아서 힘들어요. 그는 또 요즘 연방경찰이나 정보국의 보호를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고 내 의견대로 이렇게 하는게 좋을꺼요.”

“보수는 선불이오?”
“아니요, 착수금으로 50% 나중에 50%.”

“좋소, 다른 할 말은?”
“그 동양인은 요즘 너무 잘 알려져 있소, 이미 말 했지만 경찰이나 정보국에서 그를 보호할 지도 모르니 그점 잘 기억해 둬야할꺼요.”

“걱정이 너무 많으십니다. 그쪽 일이나 틀림없이 하쇼. 시간, 시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시간은 일주일간을 주욱 지켜 봤는데, 꼭 6시 정각이면 사격 연습을 마치고 나옵니다. 그시간이 5분 이상 틀린 적이 없었소. 당신이 원한다면 납치 작전 리허설을 한 번 해 볼 수도 있오.”

“언제 그놈 얼굴을 볼 수 있죠?”
“오늘 오후 4시 30분에 미리 사격장 골목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길 건너편 건물 옥상에 쌍안경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으면 되겠죠.”

“그렇게 합시다. 일이 끝나면 탈출은?”
“그것도 실전과 똑같이 연습을 한번 해 봅시다.”

“좋소.”
흑인 사내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만족한 듯이 씨익 웃었다.

그는 마약을 사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돈 되는 일이라면 당장에 시작 해야만 했다. 오늘 돈을 구하지 못하면 그의 애인 미쉘이 발작을 이르킬 것 만 같아 조바심이 들었다. 미쉘을 위해서 그는 당장에 돈이 필요했다.


*


시드니근교. 고스포드

밤새 인쇄되어 이튿날 아침에 배달되는 The Korean Herald주말판은 시드니 교민들에게 늘 좋은 읽을 거리를 제공해 주고있었다.

신문을 펼쳐든 강철(姜鐵)은 우선 헤드라인 기사부터 살폈다.
<북한 화물선 봉수호 선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라는 보도가 선박 사진과 함께 커다랗게 실려있다. 그리고 다음기사…. “북한 김정은 정권이 위조화폐, 마약밀매, 불법 무기 생산 및 수출로 국제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라는 보도와 함께
그리고….
강철 은 신문 광고란까지 빠짐없이 훌터 내렸다.
/투자자를 찾습니다 / 비즈니스 같이 하실 분/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을 찾습니다/ 라는 광고는 늘 흥미가 있었다.
오늘은 무슨 내용일까? 어디 보자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응웬 뚜이/ 실종 당시 19세/ 얼굴 특징은 웃으면 양볼에 보조개가 있음. 오똑한 콧날에 키 167Cm의 여자.…”
광고를 읽어 내리던 강철의 두 눈이 점점 왕방울 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강철 은 ‘아~’ 하는 탄성이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강철 은 광고의 다음 줄을 단숨에 읽어 버렸다.
응웬뚜이는 이런 노래를 아주 좋아했음.
“사람들은 너무 어리다고 말하죠
사랑을 하기에는 어리다고요
세월이 흘러도 이 사랑 변함 없을 거예요”

‘아~ 이 노래, 응웬이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아~ 그렇다. 응웬이다. 응웬 뚜이다.
응웬이 나를 찿기위해 신문에 광고를 다 내다니? 이런 일이? 세상에…….’
강철의 입술은 자신도 모르게 실룩여 지며 소리를 내 질렀다.

그러나 강철의 소리는 입밖으로까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다만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을 뿐이었다.






25
정체 불명의 추적자 11
시드니에서 간단하게 토스트로 점심 요기를 마친 흑인 사내는 고스포드로 차를 몰았다.
낮 시간 프리웨이는 차가 없어 한가롭기가 그지 없었다. 드디어 강철(James Kang)의 집 건너편 길가에 차를 세운 흑인이 자신의 RAV4 차창을 통해 강철의 집을 엿보기 시작했다.
사내는 오후 시간 내내 이 집을 감시했지만 강철은 집에 들어오질 않았다. 그는 무슨 일인지 어제도 그제도 사격 연습장에 나타나지를 않아 오늘 강철 의 집을 찾아 온 것이었다.

강철의 집 앞 마당에는 벤이 한대 주차해 있었다.
벤의 창문 유리에 커다랗게 써 있는 흰색 글씨< J & A 크리닝 서비스. 전화400- 2450- 1600 >
슬쩍 집안을 들여다보니 앞치마를 두른 동양 여자 두명과 유니폼을 입은 남자 한명이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전제품 위에 쌓인 먼지를 닦기도 하고 버큠으로 카펫 위의 얼룩을 제거하는 등 자질구레한 집안 소품들을 정리해가며 청소에 열중하고 있었다.

2시간쯤 시간이 더 지난 오후 6시경에야 드디어 그들의 청소가 끝났다.
앞치마를 두른 여자들은 버킷을 손에 들고 진공청소기는 남자가 어깨에 둘러메고서 집을 나오더니 그들은 도구들을 차에 모두 실었다. 그리고 집 현관문을 걸어 잠근 후 차에 올라 큰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 했다.

흑인 사내는 저들 청소원들에게 강철이 얼마 동안이나 집을 비울 것인지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저들을 뒷 쫓기로 마음먹었다. 사내는 곧 앞 차를 뒤쫓기 시작했다.
앞 클리닝 벤은 아보카비치 쪽 대로를 달려 한 작은 집 건너편 도로변에 차를 멈추었다. 곧 차 문이 열리고 키가 큰 젊은 동양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차 안에 타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요란스럽게 손을 흔들며 “bye~ bye~ see you tomorrow” 라 외쳤다. 여인의 작은 입술이 너무 귀여워 보였다. 여자는 허리가 들어나는 아주 짧은 티셔츠에 베이지색 반바지를 입고 있어 잘 다듬어진 각선미가 흑인 사내의 눈길을 끌었다.
사내는 혹시 이 여자가 자신의 미행을 눈치챌 지도 모른다라는 우려 때문에 차를 멀찌감치 세워두기로 했다.
젊은 여자는 열쇠로 자기집 현관 문을 열더니 집 안으로 사라졌다. 곧 그 집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계절이 지난 방갈로 촌의 저녁은 조용하고도 평화로웠다.

흑인 사내는 여자의 집 앞을 지키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두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자기 자동차 안에 작게 켜 놓은 라디오의 음악 소리뿐이었다.

그는 머리를 자동차 의자에 깊숙히 기댄 채로 음악을 들으면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밤은 조금씩 깊어가고 자동차의 시계바늘이 어느덧 밤 11시를 가리켰다.

이시각에 더이상 방문자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 흑인 사내가 뒤뚱거리며 자동차에서 내렸다. 사내는 길을 건너 불켜진 여자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길을 건너면서도 끊임없이 주위를 부지런히 살폈다.
주위에 인적이라곤 없었다.


여자 집 현관에 도착한 사내가 잠시 집 안쪽으로 귀를 기울이더니 초인종을 눌렀다.
곧 집안에서 인기척과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여자는 현관문에 매달린 쇠줄 안전고리를 홈에 걸어놓고 빠끔히 문을 열었다.

순간 사내는 완강한 어깨로 문을 우왁스럽게 밀어부쳤다.
쇠줄 안전고리는 그의 힘에 간단히 끊어졌다.

여자가 놀라 주춤 물러서는 사이 사내는 집안으로 재빠르게 뛰어 들어 문을 안에서 다시 잠궜다.
여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채로 떨기만 했다.




흑인은 주머니에서 잭크나이프를 꺼내 여자 목에 바짝 들이댔다.
여자의 두 눈은 초점을 잃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턱은 벌써부터 덜덜 떨기 시작했고 타들어 가는 입술을 그녀는 침으로 적시고 있었다.

“영어 할줄 알아?”
“이집에서 혼자 살아?”
흑인 사내가 한꺼번에 두가지 질문을 연달아 퍼부었다.
여자는 고개만 끄덕였다.

“남편은 어디갔어?”
“혼자에요.”
여자의 목소리는 모기소리 만큼 작았다.

“이름이 뭐야?”
“은숙 리”
“그래, 은숙 몇가지를 물어보겠다. 저쪽 침대 방으로 가자.”

흑인 사내는 현관문을 의식하며 현관쪽 전등불을 끈후 그녀를 앞세운채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방안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눈에서는 두려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기 앉아.”
사내가 침대를 가리키며 명령 했다. 여자가 침대 위에 엉거주춤 걸터 앉았다.
“너, 제임스 강 이라는 사람 알지? 강철 이라는…”
모르겠다는 뜻으로 여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너 오늘 오후에 그 집 청소 했잖아. 너희들이 마지막으로 청소한 그 집 말이야.”
“네, 하지만 집 주인 이름은 잘 몰라요. 사람이 없는 시간에 열쇠로 집 문을 열고 들어가 청소만 하기 때문이에요.” 여자가 더듬더듬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거짓말 마라.”
“사실입니다. 믿어주세요.” 그녀는 애원했다.

핏발 선 사내의 눈길이 침대에 걸터 앉아 떨고 있는 여자의 다리 허벅지와 가슴 위에 한참동안 머물고 있었다.
“너 살고 싶지? 살고 싶다면 내말을 잘 들어, 알았어?”
사내는 목에 들이댄 칼에 힘을 주며 단호하게 말했다.

“네, 네, 뭘 원하세요?” 그녀는 심하게 몸을 떨며 말을 더듬었다.
여자는 침대에 걸터 앉아 두 무릎을 한껏 모았고, 양 팔로 젖가슴을 힘껏 감싸 안았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여자는 허벅지가 훤히 들어난 짧은 옷차림에 신경이 쓰였다.

사내가 여자의 오른쪽 가까이로 다가 앉으며 또 다시 묻기 시작했다.
“강철,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저는 청소원이에요. 집주인에 대해선 잘 몰라요.” 여자가 입술을 가늘게 떨며 거듭 애원하듯 말했다.

“야~ 내가 지금 장난하는줄 알아? 엉?”
사내는 여자의 목에 칼을 더욱 바싹 들이댔다.
“제발, 제발, 제 말을 믿어 주세요. 믿어주세요 제발.”

“다시 묻겠다. 제임스 강 이라는 그남자 어디에 있지?”
“오! 맙소사, 아저씨, 뭘 잘못 아신거에요. 저는 청소부에요. 저는 그 집 청소하는 사람이라구요. 저는 아는것이 없다구요.” 그녀는 이성을 잃고 큰소리로 말했다.

순간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이 여자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두개골이 흔들리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여자의 입가에는 핏기가 내 비쳤다.

“죽여버리겠어!”
사내의 협박에 여자는 더 이상 눈물도 흘리지 못했다.

“너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그가 너를 고용했잖아.”
“저는 그 집, 현관 열쇠를 받아 집 청소만 하는 청소부입니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녀는 이제 혼이 다 나갔다.

“그럼 그 집 열쇠 가지고 있어?”
“네.”
“경보 장치 해제 번호는?”
“01230 A WAY 입니다.” 넋을 잃은 듯한 그녀의 입에서 자동적으로 튀어 나온 대답이었다.


이튼날 밤,
하루가 지났지만 그녀는 오늘밤도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난밤 흑인 남자가 집안으로 들어서는 광경이 눈앞에 다시 선명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낮시간에 열쇠 수리공을 불러 현관 자물쇠 장치를 튼튼한 것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침실 문 열쇠도 커다란 것으로 바꾸었다.
그가 다시 어떻게든 집안으로 침입해 들어온다면 곧장 침실로 들이닥칠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이민자의 삶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늘 용기를 가지고 용감하게 살아왔다.
그녀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현실에서 도망치지도 않았다. 그녀는 경찰을 그다지 신뢰할 수 없었다.
경찰은 항상 눈 앞에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이상, 현행범이 아닌 이상 체포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골똘한 생각끝에 그녀는 부엌으로 들어섰다.
부엌 칼집에서 다용도 칼을 한 자루 골라 집어 들었다. 이런걸로 사람을 찌를 생각은 없지만, 지난 밤처럼 자신이 강간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면 할 수 없을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녀는 칼을 챙겨 들고 거실 장식장에 진열되어 있는 크리스탈 잔을 꺼냈다.
그리고 술잔 가득 브랜디를 따랐다.
그것들을 들고 그녀는 침실 목욕탕으로 향했다.
그리고 욕조 턱에다 그것들을 내려 놓은후 뜨거운 물을 욕조 가득히 채우기 시작했다.

물이 채워지는 동안 그녀는 현관 문과 방문을 한번 더 단속했다.
그리고 옷을 벗은 후 천천히 욕탕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어제 밤 더렵혀진 자신의 몸을 욕탕안에서 정갈하게 씻어 내렸다.

이따금씩 브랜디를 한모금씩 마시며 까칠한 타월로 몸 구석구석을 닦아 냈다.
그리고 물 속 깊숙히 몸을 담구었다.
그녀는 눈을 지긋이 감고서 나머지 술잔을 마저 비웠다.
그제서야 서서히 졸음이 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욕조에서 일어서며 허리를 깊숙히 굽혀 욕조 바닥 배수구를 열었다.
욕조의 물이 세찬 소리를 내며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커다란 타월로 몸을 닦았다.

이제 그녀는 칼을 집어들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 머릿탁자 스탠드에 불을 켰다.
칼은 탁자 위에 올려놓고 알몸만 침대 속으로 파고 들었다.
나른했다.
온몸의 관절이 풀리고 힘이 없어졌다. 브랜디 때문이었다.

그녀는 방문쪽을 다시바라보았다. 새로 장치한 견고한 열쇠고리가 믿음직스러웠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숴뜨리진 못할 것이었다.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서서히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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