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10-08-12 조회수 : 1087
4월에 떠나버린 자유월남 (펌)








대한민국은 이 지구상에서 유일하게도 아직까지 분단국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는 나라이다. 1975년 4월까지 만해도 자유월남이란 나라가 남북으로 갈려져 있던 상황이 우리와 거의 쌍둥이 같았던 모습이었다. 미국에 이어 우리도 아시아의 자유우방 자유월남의 공산화를 막으려 많은 전투 병력을 파견하여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감수해가며 악전고투를 벌였으나 그들은 우리의 뜻을 배신이나 한 듯 저버리고 마침내 1975.4.30 공산 월맹 앞에 힘없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영국의 시인 티. 에스 엘리엇이 그의 장편 시 ‘황무지(The Waste Land)’ 에서 말한 바로 그 잔인한 4월에 우리가 그토록 가슴에 품고 형제 같은 친교를 나눴던 우방 자유월남은 지금으로부터 31년전 4월 마지막 날에 역사적인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제 며칠 안 있으면 또 서른한 번째  그 기억 속에 아련한 자유월남이란 우방국이 우리 곁을 떠난 날이 다가온다.

나는 1970-1971도에 파월되어 한국군 군수 연락단 연락장교(육군중위)로 월남의 해군기지 캄란베이의 미제 1군수지원사령부와 사이공시와 비엔호아 공군기지 주변에 위치했던 주월 미 육군사령부  롱빈 보급창 내에서 주로 백마사단 전투물자 지원업무를 수행 했었다.

그곳에서 근무당시 나는 과연 미국이 한마디로 큰 나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눈이 모자라도록 넓은 보급창 내에 빼곡히 들어선 창고시설도 부족하여 광활한 야드에 노적가리처럼 쌓아놓은 각종 군수물자들을 보며 그때만 해도 미국이란 곳은 꿈에서도 본 일이 없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허구 한 날 보급창에 개미 떼처럼 줄을 서서 보급품을 수령하는 자유월남의 군이나 민간 차량들을 보며 한편 부럽기도 했고 샘 도 났던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실은 그 많은 보급품의 마지막 도착지가 어딜까 하고 무척 궁금했었다. 그 이유는 이글을 읽는 네티즌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 더 흥미로울듯하다.

귀국하여 얼마 있다 전역 후 외국인회사에서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 어느 날 자유월남이 패망했다는 대서특필의 뉴스가 터져 나왔다. 그게 바로 1975.4.30 오후시간이었다. 더구나 군인의 신분으로 참전했던 당사자의 한사람이었기에 실로 착잡하고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이 엄습함을 느꼈다. 주위에 아무도 나와 같은 느낌을 공유하고 나눌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현장에 있었던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와의 현격한 차이를 눈으로 보는듯했다.

그날 저녁 나는 참 많은 양의 술로 착잡함을 달랬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지금도 자유월남의 패망을 생각하면 늘 교활하고 배은망덕한 누군가로부터 큰 사기라도 당한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가 없다. 그래서 오늘은 머지않아 월남이 패망한지 31번째 해를 맞음에 즈음하여 나 나름대로 그들이 허망하게 무너진 이유에 대하여 나름대로 기억을 다시 더듬어보고 몇 마디 피력해 보고자한다.

나는 월남에서 근무시 군인 신분이었음에도 휴일이면 가끔 미군 영내를 빠져나와 멀지 않은 디안의 비둘기 부대나 사이공의 주월 사령부에도 들리고 또 사이공 시내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특히 1971년 4.5월경으로 기억 되는데, 사이공거리에서 마주치는 광경이라곤 종교인들과 학생들이 합세한 데모군중들이다. 닥치는 대로 파괴하고 외국인을 위협하고 길 한복판에서 온몸에 석유를 끼 얹고 분신하는 승려들의 모습은 무정부의 극치였으며  외국인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나 같은 현역 군인에겐 그들의 행위가 얄미운 배신행위로 비춰졌다.

당시 복잡했던 국제정치 분야에 대해선 별로 아는바가 없던 나 같은 초급장교의 생각에도 이 나라는 오래 버티지 못하겠구나하는 판단을 할 수 있었으니 그들의 멸망은 이미 계산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 같다. 자유월남은 날이면 날마다 그들이 자초한 사회적 혼란과 분열, 정치인들의 아전인수식 싸움질과 파렴치한 부패의 만연 그리고 끈질긴 공산주의자들의 준동과 속임수 때문에 패망했음이 자명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973.1.27 파리평화협정 조인 후에도 자유월남의 정치인 학생 종교인 들은 단합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론분열로 더욱더 치달았으며 더욱이 젊은 학생들은 국가의 징집 명령에 반기를 들고 데모로 소일하며 병역의무를 기피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인권과 민주화를 부르짖는 무리들의 숫자는 날로 더 늘어나고 국론만 분열시키는데 앞장선 꼴이 되었었다. 50억 달러 라는 천문학적인 전비를 퍼부은 미국의 깨진 독에 물붓기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 뻔하고 미국은 또한 자유와 평화를 스스로 지키려하지 않는 자유월남 사람들의 얄미운 처사에 크게 실망하고 또 맥이 풀렸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이 넘겨준 각종 현대화된 군 장비 특히 1,800대의 최신예 전투기와 115만의 대 병력을 가진 월남이 고작 정규군과 베트콩을 합쳐 40만밖에 안되던 넝마주의 군대 월맹에게 힘없이 나가떨어진 것이다.  당시 세계 4위에 해당하는 국방력을 가지고도 그렇게 힘없이 졌다는 것은 당시의 자유월남인 모두에겐 대대로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기록될 것이다. 전 국민이 적과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통째로 공산주의자들에게 바치는 일을 방조한 반국가적 역적행위를 저지른 셈이다.

우리 월남전과 한국 싸이트(www..co.kr) 게시판에는 며칠 전부터 내 자신 월남어에 문외한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영상의 그림 내용으로 보아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당시 월남 패망 후에 미국으로 건너간 자유월남인들 과 그들의 후세대들의 소회를 담은 큰 잔치의 모습을 패망당시의 처절했던 모습과 더불어 이런저런 내용들을 긴 다큐멘타리 형식으로 제작한 동영상이 업로드 되어있다.

동영상속에 비치는 큰 홀을 입추의 여지없이 메운 재 미국 월남인들을 보면서 그들로부터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며 타산지석으로 여기고 값진 우리 나름대로의 교훈을 터득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30여 년 전 일엽편주에 몸을 맡기고 망망대해에서 사투를 벌였던 그들이었지만 이제부턴 그들이 미국 시민의 모습으로 다가 왔지만 공연 중간 중간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훔쳐대는 관객과 목이 메여 말을 잘 잇지 못하는 진행자를 보면서 실로 진한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없다.

하고 싶은 말은 제아무리 기름기 흐르는 얼굴에 호사스런 옷을 입고 있는 이 시각에 나라 잃은 저들에게 그 호사스러움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것이다. 나는 자유월남의 이런저런 경우를 반추해 보면서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나의 맺음말로 가름 하고 싶다.

첫째, 어느 상대이던 간에 우리의 힘이 받쳐주지 않는 협상이나 대화는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미가 없다.

둘째, 비록 물리적으로 담보된 튼튼한 국방력을 가졌더라도 국론이 분열되면 무용지물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과 기타 논객들이 자유월남의 패망이후 그 패망의 원인을 여러 각도로 분석한 대동소이한 내용의 글들을 논문형식으로 많이 발표하였기에 나의 맺음말이 그리 새롭고 특별한 내용은 아니나 단, 국가가 존재하고 그 다음에 비로소 나라는 개인이 존재할 수 있다 라 는 평범한 진리를 좀더 넓은 의미로 강조하고 싶어 두서없이 몇 마디 피력한 것이다. 온 국민이 단합된 모습을 보임으로서 어떠한 경우라도 국론분열을 막아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대한민국을 얕볼 수없게 해야 할 것이다.


        정재성


       rokf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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