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10-08-01 조회수 : 1119
고(故) 최범섭 중령

 


 


고(故) 최범섭 중령은 1966년 6월, 베트남에 파병된 태권도 교관이었다. 당시 한국군은 1964년 9월, 의료지원단을 베트남에 파병하면서부터 10명의 태권도 교관을 파병, 남베트남군 교육 기관에서 태권도를 가르쳤다. 그때부터 남베트남에서 태권도는 요즈음 ‘한류 열풍’과 같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됐다.

태권도 열풍이 확산되자 주월 한국군사령부는 전문 교관을 200여 명으로 늘려 남베트남 군단급 부대에 한국군 태권도지구대를 설치했다. 아울러 맹호·백마·청룡 등 각급 부대도 태권도 교육에 적극 나서도록 했다.

그 당시 파병됐던 최소령은 메콩강 남쪽 ‘껀토’에 위치한 남베트남군 4군단에 파견된 4지구대장이었다. 당시 껀토 일대에 주둔한 한국군은 태권도 교관뿐이었다. 따라서 최소령은 그 지역에서 일하는 40여 명의 한국인 기술자에 대한 후견인 역할까지 담당하게 됐다.

최소령이 껀토 지역에 진출해 태권도를 전파하며 1년 반 정도 지난 68년 1월31일, 음력으로 1월1일이 됐다. 그날을 베트남 사람들은 ‘뗏’(Tet)이라고 부르며 우리나라의 설과 추석을 합한 만큼의 중요한 명절로 여긴다. 따라서 그들은 뗏 전후 일주일 정도는 전쟁까지 휴전하며 명절을 즐겼다.

전쟁이 격화되고 있던 68년에도 축제 분위기는 어김없었다. 남베트남의 많은 병력이 고향을 향해 휴가를 떠났으며 우방국의 병력도 느긋한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민간 기업체도 문을 닫았으며 취업한 한국인 기술자들도 명절 분위기에 도취돼 있었다.

그러던 1월31일 새벽, 베트남 전역에서 전쟁의 전환점이 됐던 ‘뗏 공세’ 일명 ‘구정공세’가 시작됐다. 최소령이 근무하고 있던 껀토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로 인해 평화롭던 껀토 일대는 단번에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전장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때 4군단사령부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최소령은 시내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한국인 기술자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인 2월1일 오전 10시쯤 보좌관 윤청길 중사를 대동하고 껀토 시내로 나가 민간인 기술자들을 소집했다.

최소령의 동분서주 끝에 정오까지 20여 명의 기술자가 모이자 그들을 태권도지구대로 긴급 대피시켰다. 그리고 남베트남군으로부터 장갑차 한 대와 카빈소총 20정을 차용, 그들을 무장시킨 후 자체 경계를 강화하며 사태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내에 침투한 베트콩들의 도발이 점점 더 격화되면서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나머지 20여 명의 동포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던 최소령은 2월6일,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윤중사를 대동하고 시내로 달려갔다.

그는 시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민간인 기술자들을 소집하다가 베트콩 다섯 명과 조우, 총격전을 벌이게 됐다. 베트콩과 교전에서 윤중사는 초전에 전사했다. 최소령은 다리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 발이 장전된 권총으로 응사하며 교전을 계속한 결과 베트콩 두 명을 사살했지만 결국 전사하고 말았다.

최소령은 태권도 4단의 사범으로 베트남 젊은이들에게 태권도를 통해 한국의 얼을 심으며 젊은 생을 마쳤다. 정부는 그의 동포 사랑과 책임감을 높이 평가하며 그에게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1계급 특진을 추서, 그의 높은 뜻을 기렸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우리는 화랑의 후예 온 몸에 피는 솟구치니 오직 정의를 위해선 온몸을 제비같이 손과발 그리고 이마는 총알보다 빨랐고 폭탄보다 강했다.


  (아유! 정말 비호같이 날아서 열사람이나 뛰어 날랐다 그러면 한쪽에선 동시에 꽝하고 격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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