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운영자 작성일 : 2011-02-05 조회수 : 3859
월남전 포로국군의 證言

 





[추적] 북한에 있다는 派越국군 두 사람 - 月刊朝鮮/2000년9월호
 



 


『安鶴壽 하사와 朴聖烈 병장은 포로가 된 뒤 拉北됐다』


지난 2000년 7월13일 오전 11시. 서울 중구 소재 세실 레스토랑에서는 한 越南(월남) 참전군인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을 마련한 주체가 출판사였다는데서 알 수 있듯이 이 기자회견은 책의 출간과 관련된 하나의 이벤트였다. 이 인물은 자신이 월남전에서 겪은 경험을 두 권의 책으로 묶어 그 즈음에 펴냈고, 책의 제목은 「느시」였다. 느시는 멸종위기에 처한 천연기념물 제206호인 새(鳥)로 춥고 광활한 대지에서 서식하며 거친 환경에서도 강인하게 생존하는 겨울새의 상징이라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이 사람의 월남참전 경험이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국방부 공식발표에 따르면 그는 1964년 9월부터 주월 사령부가 해체된 1973년 3월 말까지 8년8개월여 동안 월남전에 참전한 32만여 명의 參戰勇士(참전용사) 가운데 포로가 된 단 세명중 한명이다.


그러나 그곳에 모인 기자들의 관심은 책 속에 담긴 그의 간단치 않은 삶보다는 그의 주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베트콩이나 월맹군에 포로가 돼 북한으로 압송돼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가 최소 9명 이상은 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여기에다 그는 북한으로 간 포로 가운데 對南(대남) 선전 활동에 참여한 국군의 경우, 자진 越北(월북)이 아닌 拉北(납북)일 것이라고 덧붙여 주장을 했다.


그의 이름은 朴正煥(58)으로, ROTC 소위로 임관돼 1967년 10월에 월남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됐다. 주월 사령부 소속으로 월남군 제7사단에 태권도 교관으로 파견돼 태권도를 가르치던 朴씨는 1968년 1월 베트콩에게 포로로 잡힌 후 캄보디아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는 등 총 502일간에 걸쳐 포 로생활을 했다.


중립국이었지만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캄보디아에서 어렵게 석방된 후 1969년 6월에 한국으로 돌아온 朴씨는 2군사령부 등에서 軍생활을 더 하다가 중위로 예편했다. 예편 후 미국으로 移民(이민)을 가 현재는 플로리다에서 태권도를 보급하면서 서부 플로리다 韓人會 회장을 맡고 있다. 朴씨가 월남 참전 국군 가운데 9명 이상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는 것의 주요 증거로 삼는 것은 자신의 체험과  CIA문서다.


『내가 직접 북한이 뿌린 전단에서 사진으로 본 사람들도 있고, 캄보디아 군사 정보대에서 조사를 받는 도중 사이공에서 온 한국군 대위를 북한으로 송환시킨 적이 있다는 말을 취조하는 그곳 소령으로부터 직접 듣기도 했습 니다. 베트콩에 포로로 잡혔을 때는 월맹군 장교가 보여주는 월북자 명단을 직접 내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또 몇 년 전 비밀 해제된 미국 CIA 문서에서도 9명의 월남전 참전 한국군인이 북한에 살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1994년 국방부는 월남전에서 국군은 총 8명이 실종됐고 이 가운데 3명이 북한에 체류중이라는 월남전 참전자 실종 현황을 발표한 바 있다. 8명의 실종자 가운데 4명은 戰死(전사) 또는 殉職(순직) 처리됨으로써 생존자로 분류 된 사람은 탈영 1명과 월북 3명 등 총 4명인 셈이다. 朴씨의 주장과는 최소 5명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朴씨는 戰死나 殉職으로 처리된 실종자들 가운데도 현재 북한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있으며, 이밖에도 알려지지 않은 실종자가 더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여기에 그는 민간인 실종자도 상당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월남 전 당시 미국회사나 미군에 소속된 기술자와 돈벌이를 위해 월남에 상주하던 한국 민간인의 숫자가 군인들 못지 않았지만 그들의 실종 사실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朴씨는 민간인 기술자인 金규식이라는 사람과 함께 포로가 되었으며 석방될 때까지 金씨와 함께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민간인 포로들도 분명 있으리라는 것이다.
 


 국방부, 월남전 실종자 2명 북한 생존 확인


朴正煥씨의 기자 회견 이후 월남전 참전 실종자와 포로 문제가 불거지자 국 방부는 지난 7월27일 월남전 참전자 중 실종자는 6명이며 이 가운데 2명이 북한에 체류하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安鶴壽(안학수) 하사, 朴聖烈(박성열) 병장, 김인식 대위, 정준택 하사, 이 용선 병장, 안상이 상병 등 총 6명이 실종됐으며 이 가운데 安하사와 朴병 장은 북한에 체류중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이날 발표에서 국방부는 『1994년 발표와 실종자 수에서 두 명이 차이나는 것은 실종자로 분류했던 박우식 대위와 김인수 상병은 시체는 발견하지 못 했으나 사망이 확실한 것으로 처리해 실종자 명단에서 뺐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헬기 추락으로 실종됐던 박 대위는 1999년에 유해를 발굴, 미군중 앙유해감식소에서 DNA 검사중이고 해변가에서 휴양중 실종됐던 김 상병은 익사로 순직 처리했다는 것이다.


1994년도에 월북으로 발표했던 김인식 대위는 현재 북한 체류가 불확실한 것으로 분류했다. 1994년 발표시 월북자 3명이 2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포로에 대해서는 朴正煥씨 등 3명의 국군포로가 있었으나 월남전 終戰日(종 전일)인 1975년 4월30일 이전에 전원 석방됐다고 밝혔다.


그러나 朴正煥씨의 주장은 다르다. 포로로 잡혔을 때 월맹군의 리쿠이 대령이 보여준 북송자 명단에서 국방부가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한 장교의 이름 을 분명히 보았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는 실종자로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있는 사병들 몇몇의 얼굴 사진을 북한이 뿌린 전단에서 본 주월 사령부 소속 장병들이 많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물론 朴씨의 주장이 전적으로 맞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가 실종했을 것으로 주장하는 사병들 몇몇 가운데 한 명인 남상욱씨는 포로로 잡혀 있다가 1968년 6월에 석방돼 현재 경기도 송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종자가 더 있을 것이라는 朴씨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이 있다 . 1968년 1월부터 69년 1월까지 1년간 파월 비둘기부대 작전참모로 있던 金定洙(김정수·71·중령 예편)씨의 증언이다.


『내가 작전참모로 부임했을 때 실종자가 두 명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실종자는 작전상황실에 손실로 기록되기 때문에 변동상황을 매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부임하기전 발생했던 실종자 두 명은 1년 후 내가 귀국할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부대 실종 두명 중 국방부 발표에는 한명밖에 없어


金씨가 복무한 비둘기부대는 북한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진 安鶴壽 하사가 근무하던 부대로, 전투보다는 對民지원과 건설지원에 주력하던 부대 였다. 安하사의 실종일은 67년 3월22일로, 金씨가 작전참모로 부임하기전 이다. 그렇다면 비둘기부대에는 安하사 외에 또 한 명의 실종자가 있었던 것이고, 최소한 1년 이상 장기간 실종되어 있었다는 것은 부대로 돌아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국군의 월남참전중 비둘기 부대에서 실종된 사람은 安하사 한 명뿐이다.


그렇다면 安하사 외에 또다른 실종자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戰死者로 처리되었을 개연성이 아주 높은 것이다. 戰死者로 처리된 참전군인 중에 실종자가 있을 수도 있음을 설명해 주는 증언인 것이다.


실제 이번 국방부 발표에서 살아서 돌아온 월남 참전 국군포로 3명 중 1명 으로 발표된 劉鍾鐵(유종철·51)씨의 경우는 戰死者로 처리됐다가 1973년 3월 외신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戰死者 명단에서 이름이 지워지기도 했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朴正煥씨의 주장에 대해 『그럴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지만 검증이 안된 내용』이라면서 『현재로서는 월남전 참 전 실종자 및 포로에 대한 이번 발표가 최종적인 것이긴 하지만 언제든 새 로운 사실이 나타나면 조사활동을 벌일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월남전에 참전한 국군은 병력에서 월남전 참전 미군에 비해 10분의 1 규모 였다.


미군의 경우 월남전에서 30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이에 비해 한국군의 실종자 수는 6명이다. 이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방부 관계자는 『당시 참전 지휘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군과 달리 우리는 소규모의 방어적인 전투를 주로 벌였기 때문에 미군처럼 대규모로 포로가 발생할 소지는 없었다는 설명을 들었다』면서 『미군 실종자 수와 우리 실종자 수의 지나친 차이를 거론하는 것은 월남전의 특성을 모르고 하 는 소리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朴正煥씨의 주장에는 새로운 사실이 없다는 말인가』라는 질문 에 대해, 그는 『우리는 지금도 각종 언론 보도 내용과 미국측의 자료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 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월남전 참전 실종자들에 대한 민원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실종자 수는 변할 수도 있겠 지만 월남전 참전 실종자들의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것은 결국 또다른 실종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하는 뜻이었다.


민간인 실종자 문제에 대해서는 『국방부가 다루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들은 강제로 북송됐다』


세실 레스토랑에서의 기자회견이 있은 일주일 후에 다른 월남참전용사 서너 명과 함께 朴씨를 만날 수 있었다.


―「느시」를 읽어보았는데 날짜까지 상세히 기록해 놓았더군요. 어떻게 30여 년 전의 일들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입니다. 베트콩으로부터 탈출한 후 다시 캄보 디아 민병대에 붙잡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1주일을 굶어서 그 대가 로 구입한 볼펜과 종이로 남긴 기록입니다』


―그걸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석방된 후 조국으로 돌아왔을 때 정보기관에 일부는 뺏겼지만 대부분의 기록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쓴 체험 수기는 그것을 바탕으로 쓴 것입니다』


―분량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200자 원고지로 치면 한 1500매 정도는 될 겁니다』 ―책 속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는 말씀입니까.


『물론입니다』


―기자회견에서 월남전중 포로로 잡힌 국군 중에 북한에 생존해 있는 사람이 여럿 있고, 이들은 강제로 북송된 것이라는 주장을 했는데 증거는 있습니까.


『내가 포로가 돼서 보고 들은 체험이 증거입니다. 내 자신이 증거라는 뜻 입니다』


朴씨는 자신의 체험이 증거라고 거듭 강조했다. 특히 북에 체류중인 것으로 알려진 월남전 참전 실종자의 경우 『지금 현재의 사상은 어떤지 몰라도』 라고 전제하면서, 월북 당시 시점에서는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강제로 북송됐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朴씨는 북송 도중인 1968년 3월 베트콩 메콩 델타 지역 월맹군 임시 포로 수용소에서 월맹군 정규군 대령 리쿠이가 한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 고 있다고 했다.


『전쟁이 끝나도 한국군과 포로를 교환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당신 네들은 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에서 앞잡이로 돈에 팔려온 용병에 불과 하기 때문이다. 우리측 대표인 뉴엔 후토가 지금 프랑스 파리에 가서 미국 측 대표와 평화협상을 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와의 협상 따위는 절대로 없을 것이다. 사실상 우리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군은 한국군을 생포하더라도 포 로로 인정 않는 것이 우리의 방침이다. 네가 살길은 오직 하나, 북한으로 가는 것이다. 북한으로 가라』


이런 기억을 떠올리며 朴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으로 가는 것 아니면 죽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으로 가는 것에 동의하고 북송도중 호치민 루트에서 필사 적으로 탈출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필사의 탈출 후 당시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로 가서도 朴씨는 북한 으로 가라는 소리를 또 들어야 했다. 군인 형무소로 이감되어 조사를 받을 때 계급이 중위인 검찰관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에 가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는가? 괜스레 고집 부리지 말고 북한으로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국군 대위 한 명을 북한으로 보냈다는 말도 들었던 것이다 . 다행히 朴씨는 천신만고 끝에 캄보디아 형무소에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외부에 알리는데 성공함으로써 석방될 수 있었지만, 자신도 어쩌면 캄 보디아 형무소에서 북한으로 보내졌다는 그 대위와 같은 운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고 한다.


 


 초등학교 교장의 둘째 아들 安鶴洙


국방부는 朴正煥씨의 월남전 포로 강제 북송 주장에 대해 『우리가 공식 발 표에서 일부 월남전 실종자에 대해 「북한 체류 추정」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에 주목해 달라』면서 『현재로서는 관계 기관을 통해서 그들이 북한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확인한 상태지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가게 되었 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했다.


자진 월북인지 拉北인지 국방부로서도 판단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다. 그러나 실종자 중 국방부가 북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 安鶴洙 하사와 朴聖烈 병장의 경우는 탈영으로 처리돼 있다.


자진 월북인지 拉北인지는 판단을 못 한다면서도 북한에 체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도 그 과정이 불순하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 安하사와 朴병장은 북한이 선전용으로 뿌린 전단에 모란봉과 김일성 대학 앞에서 찍은 사진이 실린 것이 확인되었고, 북한 방송에 출연했던 것 이 확인되었다.


병적 기록부의 기록상으로 安하사는 43년생으로 경북 포항이 본적지다. 安 하사의 가족을 찾는 과정에서 먼저 알게 된 사람은 安하사의 고등학교 동창 인 朴鍾烈(박종렬·56)씨다. 安하사와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대학 졸업 후 월남전 참전 경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맹호부대에서 보안대 소속으로 對共(대공) 업무를 봤다고 한다. 현재 개인 사업을 하는 그는 약간의 고엽제 후유증을 앓고 있기도 했다.


『학수의 고등학교 시절 성적은 中上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학수가 가정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월북을 할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朴씨는 安하사의 동창들의 경우, 가급적이면 安하사와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安하사를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입 을 피해를 염려하기 때문이었는데 실제로 安하사의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安하사로 인해 곤욕을 치른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安하사의 고등학교 동창 중 직업 군인의 길을 택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철 책을 지키는 사단의 소대장으로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對南 방송이 나오 는데 그의 이름을 부르며 월북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安하사가 對南 방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로 직업군인의 길을 가던 安하 사의 친구는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등 시달렸다.


친구들도 피해를 입었지만 가족들이 입은 정신적·물질적 피해도 컸다고 한다. 동생 龍壽(48·선교사)씨와 어머니 南金順(남금순·79)씨의 증언을 토 대로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했다.


安하사는 5형제 중 둘째로 월남전 참전 당시 安하사의 아버지 永述(80)씨는 초등학교 교장이었다. 安하사의 집안 형편은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이었 기 때문에 아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당시로서는 그런대로 부족함 없 는 살림살이였다.


安하사는 고등학교를 마친 후 경북대 법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졌고, 얼마 안 있어 입영 영장이 나오자 하사관에 지원했다. 부모님들에게는 군대를 먼저 마친 후 진학을 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병과가 통신이었던 安하사는 통 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대구 5관구 사령관 암호 담당자로 배치를 받는다.


그러다가 1965년에 월남에 군의관, 간호사를 중심으로 한 군사원조단(비둘 기부대)이 파병되는데 安하사도 이때 함께 가게 된다. 安하사 가족들의 주 장에 따르면 이때는 130명이 1차로 갔는데 지원이 아니라 철저한 신원조회 를 통해 각 사단에서 인원을 선발해 월남으로 보냈다고 한다. 월남 체류 기간을 1년 더 연장했던 安하사는 가족들에게 이제 곧 귀국하게 될 것이라는 편지를 보낸다.


어머니 南씨는 편지의 내용을 이렇게 기억한다.


『엄마, 이 편지 받고 답장하지 마세요. 곧 귀국하게 되니까 받아볼 수 없을 거예요. 귀국할 때는 군의관들 하고 비행기로 서울로 가게 되니까 서울 외갓집에서 기다려주세요』


 


 북한 방송에서 나오는 安하사의 목소리


그러나 安하사는 곧 귀국할 거라는 편지를 보내놓고 몇 달이 지나도 귀국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월남이라는 나라가 워낙 멀고 전쟁터니까 잠시 귀국이 늦춰질 수도 있는 거지, 하는 마음으로 安하사를 기다렸다. 초조했지만 초조함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당시 龍壽씨는 중학교 3학년이었고, 아버지는 포항동북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었다. 그러던 1967년 3월 어느 날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는 아주머니가 安하사의 집으로 달려왔다. 그 문방구 아주머니는 대뜸 라디오부터 틀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대구문화방송 부근에 주파수를 맞추라고 했다.


당시는 북한방송과 대구문화방송의 주파수가 비슷해서 약간만 잘못 돌리면 북한방 송이 나오곤 하던 시절이었다고 龍壽씨는 기억하고 있다. 龍壽씨는 문방구 아주머니가 하라는 대로 주파수를 맞췄다. 龍壽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와 몇 달째 소식이 감감하던 형의 목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라디오를 들으니까 환영식을 하는 것 같았어요. 형의 목소리가 나오더라 구요. 형의 목소리를 들어서 반가운 게 아니라 경악을 하게 된 거지요』 라디오 속의 安하사는 환영식에 참석한 북한 군중들을 향해 『나는 배가 고파서 미국놈들이 버리는 담배꽁초나 주워 먹다가 월북을 했다』며 미국과 朴正熙 정권에 대한 비난을 퍼붓고 있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들은 安하사의 목소리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평소 龍壽씨의 귀에 익은 어투와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잠긴 건 그 렇다 치더라도 安하사의 그날의 말투는 「입말」이 아닌 「글말」이었다. 龍壽씨와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망연자실과 안타까움에 어쩌지 못하는 것뿐이었다.


安하사의 연설이 계속됐다.


『우리 아버지는 박정희와 대구 사범 동창이고, 동생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고…』 가족관계가 다 공개됐고, 그 방송은 근 일주일간 계속됐다.


결국 安하사의 어머니는 쓰러졌고 형제들은 친구들로부터 「빨갱이 가족」 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기 시작했다. 특히 공무원 등 공직생활을 하는 부모를 둔 친구들은 安씨 형제들을 철저하게 피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공 직에 있는 부모가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安씨의 아버지도 끝내는 강 요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반공 교육을 책임지는 교장으로서 학교 생활을 하 기가 괴롭다며 사표를 냈다. 安하사의 북한 체류 확인이 한 가정을 풍비박산낸 것이다.


龍壽씨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주기별로 정보기관에 불려 다니며 가족동향을 적어내야 했고, 심지어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때의 고통 때문에 검사가 돼서 복수를 하겠다는 마음도 가져보았지만 지금은 영 국 에버딘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한 후 선교사의 길을 가고 있다. 그는 자신 의 家族史를 다룬 소설 출간을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龍壽씨는 『취업이나 직장내 승진에서의 차별 등 정보기관으로부터 가족들 이 직·간접적으로 당한 피해는 사실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면서 『형 이 진짜로 살아 있는지 또 살아 있다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만 확실히 알아도 그동안의 응어리는 어느 정도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安하사는 독실한 기독교인


安하사의 가족들이 자진 월북의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첫 번째 근거는 安하사의 신앙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安하사가 신앙의 자유가 없는 공산 사회를 자발적으로 선택할 리 없다는 것이다.


安하사의 가족들은 다섯 형제 중 두 형제가 신학을 공부할 정도로 전체가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 되었지만 과거에는 불교에 가까운 집안이었다. 이 집 안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다닌 사람이 安하사다. 安하사가 다니던 교회는 불 국사 장로교회였는데 그는 이 교회에서 고등부 학생회장을 맡을 정도로 신앙생활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신앙심의 깊이를 동생 龍壽씨는 이렇게 표현한다.


『아마 지금도 생존해 계시다면 찬송가와 성경을 거의 다 외우고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安하사의 신앙생활은 군생활 동안에도 지속되었을까. 安하사 어머 니 南金順씨는 『월남에 있을 때 성경과 찬송가를 보내달라고 해서 부쳐주 었다』며 『지금도 겉으로는 몰라도 마음속으로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것 』이라고 자신했다.


安하사의 가족들이 강제 拉北을 확신하는 또다른 이유는 安하사가 북으로 넘어간 것이 밝혀진 후에도 초기에는 정보기관에서조차 安하사가 포로로 잡 혔다가 강제로 납북된 것이라는 태도를 취했었기 때문이다.


安하사의 對南방송이 나간 후 아버지 永述씨는 정보부 對共분실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安씨가 들은 이야기는 安하사가 제대 전 마지막 외출을 나갔다가 베트콩에 붙잡혀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정보부 직원이 녹음기를 가져왔다. 安하사는 포로니 까 귀환시켜달라고 호소하는 녹음을 가족들이 해야 한다고 해서 녹음을 했 던 기억을 龍壽씨는 지금도 생생하게 가지고 있다. 龍壽씨는 당시 녹음기를 들고 찾아온 정보부 직원의 몸집이 무척 컸다는 것과 다음 날에는 사진도 찍어갔다는 것 역시 함께 기억하고 있다.



 戰死에서 행방불명으로


맹호부대 소속의 朴聖烈 병장은 역시 安하사와 동갑인 1943년 생으로 충북 진천이 고향이다. 그의 실종일은 65년 11월3일이다. 9남매 중 넷째인 朴병 장은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 영등포에서 저울공장을 하는 사 촌누님댁에서 일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가정 형편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진천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朴병장의 이종사촌 金德根(김덕근·59)씨는 『주변에 밥을 굶는 집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는데도 성열이네는 끼니를 거르는 집이 아니었다』 면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성열이는 온순한 성격을 지닌 아이였다』고 말했다.


朴병장의 가족들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연락이 닿은 金씨는『혹시 성열이 한테서 무슨 소식이 있어서 그러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朴병장이 북한에 살아 있다는 국방부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고 하자 그는 별것 아니라는 투 로 말을 받았다.


『이 동네에서 성열이가 살아 있는 것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거 다 아는 사실입니다. 옛날 언젠가 성열이 사진이 실린 삐라도 우리 마을에 뿌 려졌었기 때문에 성열이가 북한에 있다는 거 모르는 사람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朴聖烈씨가 자진해서 북한으로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까.


『무슨 소립니까. 그 아이 크는 걸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 안 합니 다. 성열이가 뭐가 아쉬워서 북한을 갑니까. 걔가 밥을 굶었습니까, 그때 부모가 없었습니까. 북한으로 가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어요』金씨는 朴병장의 부모님과 큰형은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朴병장에 대해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사람은 누나일 거라며 朴聖分(박성분·62)씨의 연락처를 가르쳐 주었다.


누나 朴씨의 주장도 이종사촌간인 金씨의 주장과 마찬가지였다. 朴병장이 자발적으로 북으로 갈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다만 朴씨는 살아 있는 형제 중에는 자신이 朴병장에 대해 가장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 는 하도 오래돼서 기억이 또렷이 살아오르지 않는다고 했다. 朴씨는 朴병장 에 대한 기억이 흐릿한 것은 너무 형제가 많고, 각자 먹고사는 일에만 신경 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됐나 보다며 계면쩍게 웃었다.


朴병장이 자진 월북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심증말고 물증을 제시해 달라 는 주문에 한참을 생각하던 朴씨는 한 가지를 기억해 냈다. 전사통지서였다.


『처음에는 성열이가 전사했다는 전사통지서가 왔었어요. 전사통지서가 왔 던 걸 보면 적어도 부대를 탈영해서 실종된 게 아니라 전투중에 실종됐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아닌가요. 주변 천지가 베트콩이라는데 자진해서 월북할 생각이라면 전투에는 무엇하러 나가겠어요』


전사통지서가 朴병장의 고향집에 배달되었던 게 사실이라면 朴씨의 말은 충 분히 개연성이 있는 주장이다. 전투중에 포로로 잡혔다가 朴正煥씨가 경험 했던 것처럼 월맹군이나 베트콩의 협박에 못 이겨 북한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재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월남 참전 군인 중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밝힌 安하사와 朴병장의 가족들은 이처럼 이들이 강제 납북되었다고 주장하 고 있다. 朴正煥씨는 자신의 체험이 곧 증거라며 이들의 강제 납북 가능성 과 더 많은 월남 참전 포로가 북한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 고 있다. 朴正煥씨는 지난달 하순 미국으로 돌아가며 이렇게 말했다.


『국방부는 내 체험이 증거가 될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내 체험이 내 주장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근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月刊朝鮮/2000년9월호/金成東전속기자]


마틴리(맹호기갑)  2011/07/05 09:24:24 [답글] 수정 삭제
치열한 전쟁 그리고 작전중 실종군인...
모두 마음아픈 이야기 입니다.
베트남 전쟁중 우리 한국군은 작전지역 이외의 장소로 개별적 이동이 불가능 했었읍니다.
자진해서 월북... 개인이 어떻게 그 먼길을 갈수가 있는지 묻고 싶네요.
정말로 마음이 아프네요....
안명철  2011/11/24 15:21:37 [답글] 수정 삭제
안학수,박성열 전우 모두 작전중 또는 외출중에 베트콩에게 납치된 것이 확실합니다. 저의 경험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우리소대의 옆분대원 두명이 한밤중에 매복지로의 이동 과정에서 낙오되어 천신만고 끝에 중대기지로 무사하 귀대했습니다. 중대장은 그 사실을 보고받고 우리 소대장에게 알리고 소대장이 인원 점검을 하라고 명령하니 각분대 모두 인원 이상없다고 보고 하니 소대장이 다시 분대장들에게 직접 분대원 얼굴을 확인하라고 지시하여 분대장들이 일일이 분대원을 확인하는 도중에 월맹군인지? 베트콩인지? 두명이 장글속으로 달아났습니다. 그때 낙오된 전우가 귀대를 못했거나 적에게 붙잡혔다면 우리소대원중 대다수는 무사하지 못할뻔한 상황이였지요. 지금도 그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나는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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