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한광덕 작성일 : 2011-09-03 조회수 : 405
온 대한민국 국민들께서 음미하며 읽어주시기를 간원합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시장경제와 북의 부-자-손 3대 세습 공산독재의 체제대결에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으며, 우리에게는 북의 체제 전복기도를 예방하기위한 철저한 경계와 대비가 요구될 뿐입니다. 이 철저한 대비를 무력화 시켜 온 것이 북의 대남공작이며 이 공작의 마수에 걸려들면 대한민국 국군도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1950년 6월 25일을 전후해서 국군의 무력화 직전까지 갔던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 사건을 오늘 날 다시 상기해 내야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의 대남공작은 소련군의 북한 점령과 동시에 시작되어 오늘까지도 지속되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6.25 발발 전의 제주 4.3무장 폭동과 여수순천 반란사건, 그 후의 광주 5.18, 소고기 촛불시위 그리고 오늘 날의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반대 투쟁에도 대남공작의 개연가능성을 배제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국방부 위촉의 4.3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왜곡된 진상조사보고서의 채택에 대한 항의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의 위원직을 사퇴한 필자는 6.25 휴전이후 잠시 고개를 숙였던 대남공작이 본격적으로 재가동된 시점을 1997년 5월로 보면서 “대한민국의 위기시작은 1997년 5월 26일”이란 글을 인터넷에 올렸었고 이 사실의 전파에 주력해 왔으나 주요 언론조차도 일체 관심을 주지 않고 오늘까지도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주 4.3 위원을 역임했던 필자의 눈에는 오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제주도의 해군기지 건설 반대운동에 대하여도 온 국민들이 경계의 큰 눈을 뜨지 않으면 63년 전의 4.3무장 폭동과 같이 확대될 수 있다는 걱정을 떨칠 수 없어 이미 올렸던 글을 자구수정 없이 아래에 첨부합니다. 대한민국의 국군과 경찰 그리고 온 국민들이 깊이 음미하며 읽어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영토 지킬 군사시설 못 짓다니… 여기가 어느 나라냐?"는 전 해군참모총장 안병태 제독의 울분의 글을 읽고, 이 글 썼습니다.


 


2011.9.3. 21:00


(예)육소장 한광덕


 



                                 첨부: “대한민국 위기의 시작은 1997년 5월 26일”


 



1997년은 IMF 위기에 직면한 해였고 김대중씨가 입후보한 15대 대통령 선거의 해였습니다. 이해 5월 26일, 북한은 6.25 남침 도발 직전까지의 대남공작 실체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특집보도를 노동신문에 게재 했었습니다.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라는 제목아래 (1)‘신념과 절개를 목숨 바쳐 지킨 성시백동지의 결사적인 투쟁을 보고’, (2)‘인생의 뜻 깊은 새 출발’, (3)‘나는 김일성장군님의 특사다’ (4)‘혁명가의 신념과 영생의 삶’이라는 주제로 김일성의 비밀공작원으로 활약하다가 6.25 남침전쟁 발발 이틀 후 간첩죄로 처형되었던 성시백( “인민 공화국 영웅 1호”의 칭호를 받음)의 공작활동을 대서특필 했던 것입니다.


 



4.3 사건 발발 1년 전인 1947년 초,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으로부터 회중 금시계를 선물 받는 장면으로부터 서울 복귀 후 각 정당과 산하단체를 묶는 통일전선을 형성하고 ‘선전공작’을 위해 ‘조선중앙일보’, ‘광명일보’를 비롯한 10여종의 신문사를 경영하고 육군의 ‘사단’은 물론 예하의 ‘대대’와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까지 ‘조직선’을 늘리며 국군의 와해공작과 정보공작을 펼치며 당시 서울에서 활동했던 UN감시위원단 조직의 와해 및 방해공작 그리고 김구 선생에게 김일성의 특사임을 밝히고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직접 전달하며 참가케 하는 등등의 공작 활동 규모와 내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www.rokfv.com 인강칼럼의 헤드라인 “10년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참조)


 



대통령 노무현의 4.3사건과 관련한 정부차원의 공식사과(2003.10.31)에 대한 항의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위원회(4.3위원회) 위원직을 사퇴했던 필자는 사퇴 4년 후인 2007년 10월, 이 보도를 처음 접하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당시의 우리 국가 정보기관장들은 이 사실을 공론화하지 않았고 노동신문에 접근 가능했던 언론들조차도 계속하여 침묵해 왔을까?


 



4.3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4.3사건 당시 제주도의 경비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던 좌익계의 부하들을 애국심이 강했다고 찬양했던 ‘조선중앙일보’를 오늘날 중앙일보 전신으로 잘 못 알았던 것인데 북의 대남공작원인 성시백이가 그 ‘조선중앙일보’를 경영했다는 사실을 노동신문 특집보도에서 발견하면서 무릎을 쳐야했습니다.


 



성시백이 운영했던 ‘조선중앙일보’의 4.3사건 관련 보도내용을 당시의 기타신문들과 비교만 했어도 대통령 노무현의 4.3사건 사과는 있을 수 없었기에 그 때부터 “10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를 공론화하기위한 제 나름의 노력을 다했으나 아직까지도 혼자만의 목소리로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개명 천지에 북괴군에 의하여 천안함이 격침되고 연이어 연평도의 국군과 양민이 포격으로 사살되는 상황에서도 전쟁 도발자를 두둔하는 정치인과 일부 언론의 언행을 바라보며 밤잠을 못자며 통탄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도저히 있을 수없는 불가사의 현상이 발생하는 것입니까?


 


6.25전쟁 당시에도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가 있었습니다. 이 10대 불가사의는 6.25 정전직후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한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자서전에 나오는 말로서 약술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25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 6월 13-20일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4.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이 6월 24일 00시에 해제


5.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외출외박을 허용


6. 6월 24일 저녁에 개최된 육군 장교 클럽에서의 고급장교 댄스 파티


7. 서울 북방으로의 축차적 병력투입으로 불필요한 희생 발생초래


8. 6월 25-27일간의 국군후퇴를 반격, 북진 중으로 허위 보도한 중앙방송


9. 한강교의 조기 폭파단행


10.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


 



이 형근 대장은 그의 자서전에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의혹들을 풀 것이며 이것이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기록을 남겼는데, 4.3 사건의 배후와 배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지금까지 연구한 저의 짧은 안목에서 보면 이 10대 불가사의를 규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민국의 구국을 위해 애국시민들이 더 늦기 전에 눈을 떠야만 할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 1명, 김대중 정부 시절에 63명의 비전향 장기수가 아무런 조건 없이 북송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북송된 이들이 모두 성시백의 뒤를 잇는 인민공화국 영웅 대접을 받음으로서 암약하는 남파 간첩들의 사기는 하늘로 솟았고 이들을 체포 수색 구금했던 대한민국 대공수사 요원들의 사기는 저하 될 대로 저하된 가운데 지난 13 여 년간 4.3사건을 비롯한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이 국민들의 관심밖에 놓이면서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이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몰리는 기막힌 현실이 발생되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6.25가 북침이었고 1.21 청와대 기습도 KAL기 폭파도 모두 대한민국의 자작극으로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들 대남공작의 규모와 실체를 대대적으로 공식인정하고 찬양했던 근본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대남공작의 찬양보도 이후에 북한을 방문했던 두 분의 국군통수권자가 북의 공작에 대한 문제제기와 공식적인 중지의 요구조차도 없이 화해와 협력을 약속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대통령 김대중은 이 특집보도 내용을 모르고 6.15정상회담에 임했던 것이며 대통령 노무현은 이 내용을 알고도 “국가 보안법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고 했던 것입니까? 당시의 대통령을 보좌했던 국가정보 기관장들은 무시무시한 직무유기를 했던 것 아닙니까? ( 김, 노 두 전직 대통령에게 따져 물어야 할 것: rokfv.com 인강칼럼 #8번글 참조)


 



성시백이란 인물의 신상까지 알아야만 문제의 심각성이 부각됩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장개석 정부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되는 胡宗南 장군의 이름난 참모로 소문이 돌았다고 합니다만 실제는 18세 때에 중국공산당원이 된 모택동의 첩자였다고 하며, 서울복귀 후에는 장개석 휘하부대의 참모였다는 소문을 이용하여 조선 경비대의 요인들을 조석으로 만났다고 합니다. (참조: 상해 임시정부시절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태윤기 변호사 선생의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回想의 黃河” 갑인출판사 1975년 발행)


 



기무사령부의 자료에 의하면 김일성은 해방 후 대남공작의 적임자를 물색 중,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성시백이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인편을 보내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다고 하며 북한공작원으로 활동할 것을 약속한 성시백은 일본을 거쳐 서울에 들어와 대북무역회사 대표로 위장하여 공작활동을 하다가 1950년 5월에 피검되어 6.25발발 이 틀 후인 6월 27일에 간첩죄로 처형되었던 것입니다. 이 대남공작의 공로로 성시백은 “인민 공화국 영웅 1호”가 되었던 것이며 그의 3남은 김일성대학의 총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개인은 사기를 당하면 패가망신을 합니다. 대한민국도 대남공작의 사기를 당할 때에는 망국의 길만이 있을 것입니다. 간첩은 원래가 점으로 활동합니다만 지난 10여년의 좌파정부시절을 거치며 상하좌우의 선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어 그 위험은 더 커졌다는 생각입니다.


 



이제 우리 애국시민들은 제2, 제 3의 성시백이가 다양한 직함을 갖고 이 땅의 도처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큰 눈을 떠야 합니다. 천안함 격침 시, 그리고 연평도 포격 후에 나타나고 있는 각종의 불가사의한 현상들이 눈에 잡히지 않았습니까?


 



대한민국의 국군과 경찰은 살아있는 성시백의 후예가 혹은 그에게 포섭된 졸개가 어떤 직위에서 어떤 공작자금으로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에 까지 관심을 가지고 경계와 감시의 눈을 떠야만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안함을 격침시켰던 어뢰보다도 연평도를 불바다로 만든 방사포보다도 그리고 어떤 위력의 핵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북의 대남공작입니다. 무기는 발사즉시 그 위치가 노출되어 각성과 응징의 기회라도 주어지겠지만 공작은 누가 적인지도 모른 채 우리 끼리 눈감고 서로 싸우다 다 같이 이유도 모르는 공멸을 자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 구국의 첫걸음은 이미 많이 늦었지만 1997년 5월 26일자의 북한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내용과 의미를 온 나라에 시급히 공론화되는 것이며 오늘까지 침묵이 유지된 배경에 대한 국회의 청문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국군과 국민이 최고도에 달하고 있을 북한의 대남공작에 대해 경계의 큰 눈을 뜨고 주변을 살필 수 있을 때, 제2의 천안함 격침도 제 2의 연평도 포격도 다시는 없을 것이며 대한민국은 튼튼한 안보의 반석위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201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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