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한광덕 작성일 : 2015-06-23 조회수 : 570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유-민주-인권 투사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자유-민주-인권 투사는?

국군과 경찰관의 제복은 생명까지도 나라에 바치는 다짐의 상징이기에
의사나 간호사의 복장보다도 더욱 성스럽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며
그 전통이 세워진 곳이 선진사회이며 그 나라가 세계의 강국일 것입니다.
 
36년의 일본식민 해방 후의 반 토막 건국에서 6.25남침 전쟁을 이겨내고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오기까지는 온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무한대의 눈물겨운 비극과 형언불가의 각종 고통이 따라야만 했었습니다.
 
이 형언불가의 희생은 바야흐로 국민이 서로 인정할 자랑거리(?)였었는데도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국군과 경찰만을 양민학살 주범으로 몰아가서
언제부터인가 대로에는 활보하는 휴가 장병들의 모습이 눈에 뜨이질 않고
경찰관들이 시위군중들의 매를 맞는 진풍경의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건당시의 현지신문보도 몇 개만 알려져도 국군과 경찰의 명예는 지켰는데
4.3보고서작성 기획단장 임무를 맡은 ‘아름다운 재단’상임이사(현 서울시장)는
국방부 입장이 반영되지 않는 보고서를 고수하여 노무현 대통령의 정부차원
공식사과까지 끌어내 대한민국의 정통성까지 훼손했던 결과임을 한탄합니다!!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 이틀 전, 48년 5월 8일자 제주발 동아일보 기사에는 “목포에까지 김일성군이 내도했으니 안심하라”는 선전과 함께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총경 100만원 등의 살인현상금이 걸렸던 사실이 확인되며 (당시 쌀 한가마니 가격 300원) 여타 신문에서도 제주남로당의 각급 인민위원회에서 스탈린과 김일성을 명예위원장으로 추대하며 “곧 토지의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시작된다. 친일경찰을 사살하라”는 등의 선동이 통했던 사실이 발견됩니다.
 
5.10선거의 부정과 거부가 목표였던 ‘4.3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한 이 중차대한 사실은 진상조사 보고서의 어디에도 반영되지 않고 이로 인해 촉발된 무장폭동의 진압과정에서 발생된 주민들의 희생만을 부각함으로서 국군과 경찰은 일방적인 양민 학살의 주범이 되어야했고 급기야는 대한민국정통성까지도 부정되는 엄청난 결과가 초래되었음을 사퇴한 4.3위원으로서 다시금 고발합니다!
 
소련군정이 단행했던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46.3.5)과 비밀화폐개혁(47.12.1)의 숨겨진 파급충격은 실로 막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를 연구한 역사학자들이 그 파생효과를 알리지 못함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의 상당수가 아직까지도 4.3사건 당시의 선전선동에 속고 있음을 가슴을 치며 통탄합니다. 
 
일본식민통치를 걷어찼던 출발은 미국에 대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었음으로
해방의 기쁨에 대한 감사는 우선 미국으로 지향되는 것이 정상이었을 텐데도
무상몰수 및 무상분배에 대한 기대를 이용했던 당시 선전선동의 연장선에서
미군은 일본군을 계승한 점령군으로 매도되었고 소련군이 민족의 해방군으로
환영받았던 기현상이 오늘까지도 우리사회의 저변에 깔려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김일성 만세! 스탈린 만세! 를 부르며 토지의 무상분배에 열광했던 북한 농민들의 운명이 그 후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그들의 토지가 6.25전쟁이 끝나면서 집단농장으로 귀속되고 오늘에 와서는 3백만이 굶어죽어도 3대 세습독재에 저항하는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일본식민지 시절보다 열악한 자유와 민주와 인권부재로 회귀된 것이 탈북자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라도 한반도의 진정한 자유민주 투사는 대한민국 국군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그 목소리가 온 나라의 마을마다에서 스며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휴가 나온 국군장병들이 가슴을 펴고 시내를 활보하고 매 맞는 경찰관들이 없어진 나라를 반듯하게 세워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만 조용한 아침의 나라 금수강산을 찾는 외국의 관광객도 늘어날 것이고 삼성의 콤퓨타와 현대의 자동차도 더욱 사랑을 받으며 세계의 선진강국이 되어 피압박의 북한 동포를 구출하는 남북의 통일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동구라파 여러 나라를 소련위성국으로 만들었던 스탈린 방식의 새빨간 거짓 선전선동에 북한의 동포들이 속았던 결과가 그 후의 남북분단 비극의 출발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대한민국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 세상의 앞날을 멀리 내다보았던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높은 혜안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자유민주 의 길을 함께 결으며 “같이 갑시다!”를 외쳐온 혈맹의 동맹국인 미합중국의 장병들에 대한 고마움도 새로워지기를 바라는 노병의 마음 간절합니다.

월맹군의 기습공격으로 중대장과 다수병사들이 전사를 했던 66년 8월 9일 밤의 월남 두코 전투에서 포탄이 고갈되는 위기를,  미군 포병 2개 포대의 사격지원과 중대에 작전통제된 미군 전차 1개 소대의 적극지원으로 극복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순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노병의 각별한 심정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무관심했던 북한의 토지개혁과 비밀리에 단행됐던 비밀화폐개혁 사실에 추가되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6.25도 북침이었다고 오리발을 내밀던 북한이 97년 5월 26일에 6.25남침 직전까지의 대남공작 전모를 공식으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노동신문특집보도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로 소개되는 성시백의 대남공작 찬양보도가 있었던 날은 ‘5.18 사건’에 대한 우리 대법원의 두 번째 판결(97.4.17)이 있고 나서 39일 후였는데 아직도 관련보도가 보도가 없었습니다. 이미 10년이 지나고 있었던 이 놀라운 사실을 4.3위원 사퇴 4년 후인 2007년에 확인한 저는 그 때부터 전파를 위해 노력했으나 아직 역부족입니다.
 
‘5.18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2차 판결 직후에 북한의 대남공작 찬양보도가 세상에 알려졌었더라면 그 이후에 태동되었던 4.3위원회를 비롯한 각종 과거사 위원회의 구성을 위한 특별법은 국회통과가 용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판단을 이해하려면 97.5.26에 특별 찬양된 성시백이 누군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 정부시절, 장개석 총통의 ‘수도경비사령관’인 胡宗南 장군의 일급 참모로 당시의 세상에 알려졌었으나, 실제는 18세 때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던 모택동의 심복이었고 중국공산혁명의 공로자로서 중국인들도 그가 조선 사람임을 몰랐다고 합니다. (太倫基 著, 피어린 獨立軍의 抗爭手記, 1975. 5.30. 甲寅출판사 발행)
 
김일성은 대남공작의 적임자를 물색하던 중 그가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 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을 했었고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던 것입니다. (기무사 부대원 교육자료)
 
김일성으로부터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밀명을 받고 입국, 대북 무역회사 대표로 위장했던 성시백은 북한 토지개혁과 비밀화폐개혁에서 발생된 자금을 소형선박으로 운반하며 ‘조선중앙일보’를 비롯한 10개의 신문사를 운영하는 등의 공작활동 중 50년 5월 피검, 6월 27일에 간첩죄로 처형되었으며 2002년에 “인민공화국 영웅 1호”칭호를 받음( 노동신문 및 기무사 부대원 교육자료 )
 
성시백의 대남공작을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 렬사”로 특별 찬양했던 97년 5월 26일 노동신문 특집보도가 ‘5.18 사건’의 두 번째 대법원 판결(94.17)에 이어 온 세상에 알려지기만 했더라면 그 후의 각종 불가사의 사건사고는 발생할 수 없었다고 믿으며 이제라도 알려지기를 갈망합니다.
 
당시의 언론들이 직필을 할 수 있었더라면, 김대중 대통령이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국군포로의 송환도 없이 무조건 북송할 수는 결코 없었을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도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자는 주장은 할 수 없었으리라 믿으면서 지금 이라도 지난 8년간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 침묵은 이제라도 깨어져야만 온 국민들이 그동안 감고 있던 경계의 큰 눈을 다시 뜨게 됨으로서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모택동 심복이, 그리고 “6.25 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연출했던 공로로 ‘북한 영웅 1호’가 된 것으로 보이는 성시백의 제 2세 혹은 3세가 오늘의 대한민국 국회와 정부 혹은 언론사 등에서 신분위장으로 활동할 가능성을 예방 제한 및 차단함으로서 대한민국 안보는 튼튼히 지켜질 것을 확신합니다. 금번 발생된 메르스의 불필요했던 공포심 확산과 초기대응 실패의 교훈도 여러 각도에서 분석되어 활용되기를 바라며 줄입니다.
 
2015년 6월 23일 아침
재향군인회 정책자문위원
월남 참전자회 자문위원
http://rokfv.com 인강칼럼


육공  2015/06/23 22:46:38 [답글] 수정 삭제
한 장군님의 피 끓는 충정이 담긴 글 펌해 갑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아직 하실 일이 많습니다.
인강  2015/06/25 07:29:38 [답글] 수정 삭제
북한 광수들의 5.18 참전이 명백히 밝혀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언론들은 아직도 침묵하는 불가사의가 계속됩니다

이 침묵의 불가사의를 깨기위한 저 나름의 시도인데 육공전우께서
힘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글이 조갑제.com을 비롯한 여러 site에도 옮겨지면 더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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