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한광덕 작성일 : 2015-05-29 조회수 : 1203
스티코프(Shtykov)비망록-2

같은 날 김일성은 기독교 목사 10명을 소집해 선거에 기독교신자들의 참여를 보장할 계획을 세우도록 촉구했다. 목사들은 강양욱을 의장으로 해 5명으로 구성된 기독교분리파위원회를 조직했다.(10월 26일)



▲이그나치예프. 기독교인들이 선거반대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30명의 목사들이 참여한 위원회의 회의가 진행중이며, 위원회의조직을 알리는 호소문을 준비하고 있다.(10월 28일)



▲이그나치예프가 전화하다. 기독교 목사들이 좋지 않게 행동하고 있다.



그들은 신자들에게 선거에 참여하지 말라고 설교하고 있다. 목사들과 신부들의 비합법적인 집회가 개최되고 있다.(10월 29일)



16. 스티코프비망록 발굴 의미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6일 10面(00版)



역사연구에서 1차 자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과거의 제반상황을 규정할 수 있는 확실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경우 전쟁을 겪고 분단이 장기화된 상태에서 상당수의 자료가 유출되거나 망실되었기 때문에 공백으로 남아 있거나 추상적으로만 서술되고 있는 현대사의 부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일보가 최근 발굴한 『스티코프비망록』은 현대사연구를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된다.



일지형식으로 된 『비망록』에는 당시 남북한 상황과 정치지도자들의 활동, 그리고 소련과의 연락사항 등이 광범위하게 망라돼 있다.



이러한 내용이 중앙일보에 의해 빛을 보게 됨으로써 종래 가려졌던 많은 부분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로인해 현대사의 상당부분은 재구성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박헌영을 비롯한 남한 좌익진영의 지도자들은 3당 합당을 위시해구체적인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경쟁적으로 평양을 방문, 지시와 자문을 구했으며 소련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북한의 제반 정치행위가 소련군의 지시에 의한 것이거나, 사전에 승인을 받아 이루어짐으로써 자율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태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사실이 스티코프에의해 직접 밝혀짐으로써 당시 이들에 대한 우익 진영의 비판이 상대적으로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946년 8월초부터 남한에서는 공산당. 인민당. 신민당 3당의합당이 추진되었는데, 이는 북로당의 출범을 계기로 3당이 합법적 단일 대중정당으로의 전환을 목적한 것이었다. 합당문제에 대해 각 당대표와 중앙위원 대부분은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합당방법과 주도권문제를 둘러싸고 각 당은 심한 내부분열을 나타냈다.



합당을 놓고 각 당은 2개의 흐름으로 분열돼 결국 3당이 6개 파벌로 나뉘고 말았다. 이중 공산당의 간부파와 인민당의 47인파. 신민당의 중앙파가 합동해 남로당을, 공산당의 대회파와 인민당의31파. 신민당의 반 중앙파(反中央派)가 합쳐 사로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빚어진 혼란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확대되었으며 양파는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북한을 방문, 소련군의 지시를 받으려 했다.



여기서 소련군이 남로당편을 듦으로써 남로당은 좌익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됐다. 이를 계기로 사로당은 해체되는 운명을 겪게 되며, 이에 참여했던 여운형. 백남운 등은 자기비판을 하고 정치일선에서 당분간 물러서게 됐다.



17.스티코프비망록 나는 이렇게 본다게 재 일 : 1995년 05월 30일 10面(40版)



김재순 전 국회의장



『스티코프비망록』은 김일성정권이 소련의 괴뢰정권임을 생생하게 입증하는 산 자료다.



그 당시 나는 서울대학교 상과(商科)에 재학중이었는데, 좌익진영의 학생들은 말끝마다 『자기들의 조국은 소련』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녔다.



또 좌익세력 역시 『프롤레타리아와 핍박받는 자의 조국은 소련』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사람들은 설마 하겠지만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비망록을 보니까 당시 좌익세력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평양을 방문해 소련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앞다투어 소련측의 신임을 얻으려고 경쟁을 벌였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좌익세력의 사대주의적인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비망록은 또 당시 남북한에서 일어났던 여러 정치적 사건들의 이면(裏面)을 사실감있게 묘사하고 있어 흥미롭다. 소련의 對 한반도정책의 진면목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 이 비망록의 자료적 가치를 더해준다.



이 같은 귀중한 자료를「발로 뛰어」 발굴한 중앙일보 현대사 연구소팀의 노고를 치하한다.  



18. 스티코프비망록 나는 이렇게 본다 ▶ 게 재 일 : 1995년 05월 30일 10面(40版)



지금까지 실증적 자료가 없어 자신 있게 주장하지 못한 해방정국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평소의 생각이 사료로 입증돼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일례를 들어 46년 9월 총파업과 10월폭동에 소련이 직접 개입한 사실이 그렇다. 이제까지 일부 진보주의 학자들은 미군정(美軍政)정책에 대한 대중의 평소 불만이 누적돼 일어난 것으로 주장해 왔다.



물론 이런 요인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망록을 통해 소련이 직접 지시한 흔적이 역력히 엿보인다.



비망록에 나타나 있진 않지만 46년7월 박헌영이 신전술을 채택해 폭력노선으로 전환한 것도 아마 소련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확신이 든다.



이제부터 해방정국에 대한 역사 서술은 달라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스티코프비망록』은 역사를 다시 쓰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빨리 비망록 전체가 번역. 출판돼 많은 연구자들이 이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 <스티코프비망록> 전문가회담 ▶ 게 재 일 : 1995년 05월 30일 10面(40版)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최근 러시아에서 발굴한『스티코프비망록』1부연재가 끝났다. 비망록을 통해 해방정국의 감추어진 역사적 진실이 새로 밝혀지자 학계는 『현대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됐다』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고, 당시를 체험했던 독자들 도 『이제야 모든 것이 사실대로 밝혀지는구나』하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관련 학계와 독자들에게 준 충격이 너무 컸기에 자료의 가치에 대해 검증작업을 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는 최상용 고려대 교수, 심지연 경남대 교수, 도진순 창원대 교수 등이 참석했고, 중앙일보 이동현 현대사전문기자가 사회를 봤다.



사회: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7개월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발굴한『스티코프비망록』이 6회에 걸쳐 소개됐습니다. 연재 중 관련연구자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서 수많은 격려전화가 걸려 왔고, 가능한 한 빨리 비망록 전체를 번역해 출간하라는 요청이 쇄도해 비망록에 쏟는 관심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이 비망록이 어느 정도의 자료적 가치가있는지 먼저 개괄적인 평가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沈교수: 우선 시기적으로 볼 때 이 비망록은 1946년 9월부터 47년 2월까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제1차 美蘇공동위원회가 무기 휴회되면서 국내외 정국이 극도로 혼미스럽던 시기죠.



이를테면 남한의 우익진영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한국 민주당이 주축이 돼 자율정부수립운동을 전개했고, 중도진영은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습니다. 좌익진영은 美蘇공위를 재개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3당 합당을 추진했고, 북한에서는 소비에트화를 위한 제반 조치가 취해져 공산당의 지배가 확고해진 상태였죠.



바로『스티코프비망록』은 남북한 내에서 일어났던 이 같은 정치적 사건들을 올바로 규명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崔교수: 저는 자료의 가치 여부를 논하기 전에 먼저 사실 인식의 문제와 사실 해석의 문제를 짚고 넘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제가 말하는 사실인식의 문제란 사실 확인의 문제고, 사실 해석의 문제란 확인된 사실을 토대로 해석 내지 평가하는 것을 말하죠.



여기에서 인식의 문제가 제일 중요해요. 인식의 문제는 합의도가 매우 높죠. 1차 자료가 나와 판명이 되면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도달하기 쉬운 것이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그 다음이 해석의 문제인데, 여기에는 아무래도 해석자의 세계관이나 역사관이 들어가게 마련이죠. 지금까지는 1차 자료가 결여돼 사실 인식 또는 사실 확인이 희미한 상태에서 해석과 평가만이 난무했죠. 그런 점에서 이번『스티코프비망록』은 사실 인식. 사실 확인의합의도를 높이는데 가위 결정적 의미를 지닌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都교수: 비망록에는 당시 북한의 소련군지도부가 남한 내의 정세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상황전개에 따라 남한의 좌익진영에 지시를 내린 사실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지금까지 상층부의 지도나 지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대중적 불만이나 의지의 표출에 초점을 맞춰 당시 대중운동을 서술한 일부 기존의 연구는 수정돼야 할 것 같아요.



사회: 이제부터는 각론부분에 대해 말씀을 나누죠. 46년 해방정국을 뒤흔들어놓았던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 3당 합당, 좌우합작 등에 대해 비망록에서 새로 밝혀진 사실들이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沈교수: 우선 좌우합작의 경우 소련이 추진을 강력히 반대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죠. 10월 폭동때 소련이 자금지원 등을 한 것도 새로 드러난 사실이죠. 또 그 당시 제기된 각종 구호라든지 전술이 스티코프의 직접 지시에 의해 이루어진 것 도 주목할 만합니다.



3당 합당의 경우 지도부 구성을 소련군책임자. 김일성(金日成). 박헌영(朴憲永) 3자가 합의해서 결정한 점도 새롭구요. 박헌영이 수시로 소련군당국자에게 제반 문제에 대한 자문이나 지시를 구함으로써 남로당이 소련의 지시나 명령에 의해 움직였음이 새로 확인됐죠. 이렇게 볼 때 좌익진영은 북한 주둔 소련군당국자의 지시나 전략에 따라 활동한 측면이 상당히 강합니다.



都교수: 당시 남한의 좌익지도부가 중요한 사항을 매번 보고하고 소련 측이 일정한 지원을 했다는 사실을 비망록을 통해 확인한 것은 큰 성과입니다. 또 제가 전혀 모르던 부분인데 비망록에서 새로 안 사실은 박헌영이 월북한 직후인 46년 12월 남로당과 북로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죠. 김일성과 박헌영 사이에 대결 내지 경쟁이 본격화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이 대목을 보면서 두 사람간의 경쟁은 상당히 일찍 시작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崔교수: 자료의 가치와 자료에 대한 해석을 연결하는 고리와 관련해서 하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어요. 1차 자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내린 연구의 결론들은 대개 두 가지였죠. 하나는 냉전적 단정이에요. 여기에는 반공적 입장이나 좌파적 입장과 같은 본인의 희망적 관측이 들어가죠. 이 경우 1차 자료에 의한 검증은거의 고려하지 않고 먼저 결론이 나와 있어요.



또 하나는 학문적 추측, 그러니까 1차 자료는 아니지만 제한된 모든 자료를 섭렵하면서 추론의 과정을 거쳐 결론을 내리 는 경우죠. 그런데 이번 자료의 발굴로 전자의 입장에서 결론을 내리는 쪽이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됐어요. 그렇다고 해서 전자가 전적으로 옳다고 얘기하는 것은 학문적으로 문제가 있죠. 1차 자료로서의 중요성을 인정하되 약간의 사료비판을 가하면 서 지금까지 주장돼온 학설이나 연구 결과를 수정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봐요.



그것과 관련해서 10월 폭동에는 자발적 계기가 반드시 있었다고 봅니다. 예컨대 밑으로부터의 불만과 전국적인 좌익조직화라고 하는 부분이 엄연히 존재했고, 거기 에 소련측의 개입이라는 또 다른 측면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사회: 이번 비망록을 통해 전전(戰前)볼셰비키로서의 박헌영의 면모가 확실히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崔교수: 비망록이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메시지를 준 것 같아요. .박헌영은 확실히 전전 볼셰비키입니다. 전전 볼셰비키의 행동양식은 공산당의 본부인 코민테른의 지시만을 따른다는 것이죠. 이를 어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어요. 이것이 바로 전전 볼셰비키의 행동의 한계이자 본령이죠. 1920년 이래 쭉 그래왔고 심지어 蘇군정기에도 이 같은 행동양식이 그대로 견지되었죠. 그것이 이 자료에서 확인된 것은 대단히 의미가 큽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아요.



沈교수 :박헌영이 전전 볼셰비키로서 코민테른의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랐다는 것은 이번에 분명히 드러났죠. 아까 都교수께서 지적했지만 박헌영이 월북하고 나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는 점은 매우 흥미롭더군요.



都교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비망록에는 박헌영과 남로당 지도부의 전전 볼셰비키로서의 행동양식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또 좌익세력이 앞 다투어 소련에 대해 인정받고 싶어 하는 모습도 묘사돼있더군요.



사회: 비망록에서 밝혀진 북한사회상도 주목할 만하지 않습니까.



沈교수: 증언을 통해 알려진 소련 측의 북한으로부터의 물자 반출이 사료로 입증된 것은 큰 의미가 있죠. 북한주민에 대한 소련군의 난폭. 약탈행위가 확인된 점도 기왕의 냉전적 시각이 아니더라도 사실적 차원에서 중요하죠.



都교수 :중앙일보가 자료의 가치에 대한 검증을 학술적으로 걸러보려는 자세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남북한 현대사를 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평가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沈교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현대사 연구는 세가지차원에서 분석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는, 남한이나 북한만을 따로 떼어 분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죠. 상호간에 영향을 미쳤고 또 영향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존립해왔기 때 문이죠.



둘째는, 국제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런 시각을 갖지 않으면 한반도문제에 대한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죠.



마지막으로 그 당시 우익진영이 친미적(親美的)인 데 비해 좌익진영은 독자적이었다는 그런 식의 편견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고 봐요. 좌익진영도 우익진영 못지않게 대외 의존적이고 종속적이라는 사실이 이번 비망록에서 드러났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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