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한광덕 작성일 : 2015-05-29 조회수 : 1054
스티코프(Shtykov)비망록 -1

결국 남로당은 11월23~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 출범했고, 사로당은 47년 2월 당 대회를 열고『남조선 민주진영의 세력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했다 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蘇군정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의 승리가 확정된 것이다.



스티코프는 12월2일『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을 지시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러나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蘇군정의 기대와는 달리 이미 10월 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다. 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남로당과 북로당 창당 작업이 완료되자 두당간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현안으로 등장했다. 스티코프가『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한다』고 지시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티코프는 12월6일에도 같은 지시를 내렸다.



이와 관련, 46년 12월12일자『비망록』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박헌영이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김일성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처음 밝혀진 것이다. 이것은 48년 8월25 일 만들어진「남북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구성을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하기 위해 강요했다는 통설을 뒤집는 내용이다.



박헌영은 월북 후 자신의 당내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 구성을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46년 12월3일 스티코프는 모스크바로「3당 합당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이로써 4개월간에 걸쳐 파란을 겪었던 3당 합당이 사실상 마무리 됐다. 그러나 남한 좌익정당의 단결과 강화를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은 좌익세력 내부의 갈등과 분열의 앙금만을 남겼다.



단일한 좌익정당을 결성하고 이를 기반으로 美군정에 대한 투쟁을 강화하려던 蘇군정의 의도도 합당 전에 10월 폭동이 발발함으로써 사실상 좌절됐다.



8. 스티코프비망록 3. 일지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6일 10面(40版)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대화했다. 강진(姜進.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 10월29일까지 북조선에 머물도록 약속 했다. 로마넨코와 강진의 회담 후에 김일성(金日成.북조선노동당부위원장)이 강진과 대담할 것이다.(46년10월19일)



▲김일성 보고. 종파주의자들과 강진은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그들은 1백70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소집,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반대파의 통합이라는 구실 하에 대회를 개최해 다시 한 번 인민대중을 기만했다. 여운형(呂運亨. 조선인민당 당수)도 대중을 기만 했다. 그는 사회노동당(사로당)중앙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두 조직의 중앙위원회 성원은 모두 종파주의자들과 친미분자들로 구성되었다. 여운형을 비판할 것. 그러나 너무 과격하지 않게.(10월21일)



▲김일성의 보고. 김두봉(金枓奉.북로당위원장)이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과 만났다. 白과 함께 3명이 북조선에 도착했다. 白은 사로당을 정당화하기위해 북조선으로 왔다. 여운형은 그가 북조선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하지(미군사령 관)가 불러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인정할 것을 요청했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呂는 우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고 북조선을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김두봉은 白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 했으며,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 白은 자신이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사로당을 조직했다고 대답했다.



강진과 만났다. 나는 합당사업이 결렬된 모든 책임이 강진에게 있다고 말했다. 또 나는 그에게 美제국주의의 주구인지 아닌지는 확증할 수 없지만, 미국인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당신에 의해 소집된 대회는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와의 통합을 위한 것이 아니라 투쟁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은 대회를 소집할 자격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당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합당을 방해할 목적으로 대회를 소집했다. 박헌영 동지의 결정은 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 북조선 40만당원의 견해이기도 하다. 당신은 당으로부터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은 박헌영 동지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구실로 삼고 있지만, 당에 손실을 입힐 권한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당신이 지금까지 행동해왔던 것과 다른 진정한 혁명가가 되고자 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당신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그는 조언을 구하러 왔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좋게 평가하기를 원한다면 당신 스스로가 분파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당신을 전에 이미 호출했지만, 당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노동 당과 사회노동당을 통합시키겠다고 대답했다.(10월22일)



▲김두봉과 대담하다. 그는 남조선 정세에 대해 동요하는 입장을 보였고 남조선 반동파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10월25일)



▲로마넨코, 3당 합당 상황에 대해 보고. 道수준에서통합이 완료되었다.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고 중앙위원회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앙위원회 대표가 허헌(許憲.남로당 당수)을 만나 박헌영의 지시를 전달했다. 반대파들은 사로당을 결성했다. 사로당의 강령이 발표된 후 대중들은 이 당을 거부하고 있다. 사로당이 우익과 합동을 도모하고, 입법기관의 조직을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좌익정당의 분개를 사고 있다.



사로당은 파업과 무장봉기를 이유로 공산당을 비난했다. 백남운은 사로당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으며, 사로당의 선언이 자신과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성명했다. 강진도 자신의 오류에 대한 비판을 표명하고 있다. 여운형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명했다.(11월12일)



▲로마넨코, 남조선 노동당대회 총괄보고. 지시를 내리다.



1.성공적으로, 그러나 어렵게 성취된 합당사업에 대해 박헌영에게 축하할 것.



2.다른 정당들이 파악할 수 없도록 당중앙위원회를 구성할 것.



3.박헌영은 향후 행동방침에 대한 지령을 허헌에게 하달해야한다.



4.박헌영이 수행할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 선전사업에 대한 방침을 숙고할 것.



5.김일성과 박헌영은 업무상 긴밀한 연계를 확보해야 한다.



6.급사를 통해 일체의 당대회 자료를 보내도록 지시를 내릴 것.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로 보낼 남조선 3당 합당 사업총결 보고서를 준비하도록 크라프초프에게 지시를 내리다.



▲박헌영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비합법적 중앙을 창설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나는 김일성의 의향을 알아보았다. 그도 역시 동의했다.(12월12일)



▲크라프초프가 전화했다. 사로당 문제로 서울에서 보고가 있다고 알려왔다. 우리의 지시가 대개는 전적으로 받아 들여졌으며, 사로당의 붕괴가 계속되고 있다. 당 축소의 지지자는 강진이다.(12월17일)



9. 스티코프비망록 4. 좌우합작 추진 말라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8일 10面(40版)



1946년 5월 美군정이 김규식(金奎植)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할 때 소군정(蘇軍政)이 이를 강력히 저지하려 한 사실이『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졌다.



또 좌우합작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군정이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설치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 주장」등 그에 대한 대응책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직접 지시한 사실 역시 새롭게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들은 당시 박헌영(朴憲永)이 이끈 남한의 좌익계열이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입법의원선거를 전면 거부한 배경을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제1차 美.蘇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군정은 난항에 빠진 한국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좌우합작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남한에 소련 측이 호감을 느낄 수 있는 세력을 등장시켜 이들로 하여금 남한의 정치적 통합을 주도하게 함으로써 장차 소련과의 협상을 원만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또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온건좌파를 분리시킴으로써 공산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도 함께 포함됐다.



한편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만규(李萬珪)는『여운형은 자신이 좌우세력을 통합시켜야 한다는 개인적 사명 때문에 좌우합작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은 당시 좌파의 지도권을 놓고 박헌영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터에 미 군정으로부터 좌우합작 추진 제안을 받자 박헌영을 고립시킬 수 있는 기회로 판단하고 이를 수락한 측면이 강했다.



반면 김규식은『독립정부를 수립해보겠다는 의욕에서 좌우합작에 뛰어들었다』고 스스로의 입장을 밝혔다.



좌우합작운동은 46년 5월25일 좌우익 지도자들 간에 첫 회합을 가진 이래 여러 차례의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같은 해10월7일「좌우합작7원칙」이라는 합의점을 도출해 냈다.



지금까지 김일성(金日成)을 비롯한 북한지도부가 좌우합작에 반대한 것은 알려져 왔다. 그러나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망록』에 따르면 스티코프는 46년 9월24일 북한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무슨 답변을 주어야 할지 스탈린의 지령을 요청했고, 이틀 후 소군정 민정(民政)사령관인 로만넨코에게『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명백히 반대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소군정이 좌우합작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여운형에게 전달하기로 했으면서도 그에 대한 신뢰여부를 검토했다는 점이다. 이는 여운형이 과연 그런 지시를 수용할지 소군정이 의문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또 소군정이 여운형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한 것을 보면 당시 여운형이 일방적으로 소군정의 지시를 받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망록』은 좌우합작에 대한 소군정의 반대의사가 확고함에 따라 북한지도부도 좌우합작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취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이 같은 점은『김두봉(金枓奉)이 백남운(白南雲)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했으며, 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느냐』고 힐문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실제로 좌우합작은 박헌영이 이끄는 남조선 노동당측의 비타협적 태도와 폭력노선 추구, 그리고 신탁통치 문제 및 토지문제로 인한 우익측의 좌우합작7원칙에 대한 거부로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비망록』은 좌우합작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제도적 차원에서보장하고 남한 행정에 한국인의 참여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미군정이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을 수립하려 하자 소군정이「인민위원회로의 정권 이양」요구로 맞설 것을 남조선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지시한 사실을 처음 밝히고 있다.



또 입법의원 선거시 토지개혁과 조세개혁 등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울 것을 직접 지시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당시 남한 좌익측은 미군정의 탄압을 이유로 선거에 불참했지만 10월 폭동과 맞물린 선거기간(46년 10월21~31일)중 이런 구호를 줄곧 외쳐댔다.



입법의원 개원 직후 박헌영이『만일 50%의 의석을 준다면 입법의원에 들어가도 좋은지』를 소군정에 문의한 사실은 당시 남한좌익의 의사결정에 소군정이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10. 스티코프비망록 4. 일지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8일 10面(40版)



▲레베데프(蘇軍 25군 정치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입법기관 창설과 관련한 남조선 좌익의 활동방향에 대해.(46년9월21일)



▲스탈린 동지 앞으로 암호전문을 보내 여운형(呂運亨.조선인민당 당수)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령을 요청했다.(9월24일)



▲로마넨코(蘇軍 민정사령관). 김일성(金日成.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과 여운형의 회담이 있었다. 여운형은 재차 蘇군정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하달.(9월25일)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들을 하달하다-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할 것. 남조선 좌우합작을 추진하지 말 것.



美군정이 남조선에서 추진하려고 하는 정부에 참여하지 말 것. 왜냐하면 이것은 중앙정부의 수립을 앞당길 것이기 때문이다.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개혁에 대해 설명해 줄 것.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할 것. 우리는 이승만(李承晩)이나 김구(金九), 혹은 다른 우익 지도자들이 당신(여운형)이나 좌익지도자들보 다 인민들 속에서 신망을 얻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9월26일)



▲로마넨코. 어떠한 문제들이 제기될 것인가. 입법기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군정에 대해 어떠한 전술을 취할 것인가. 그(여운형)에 대한 소군정의 신뢰여부.(9월27일)



▲회담은 좋은 분위기 속에서 3시간 동안 지속됐다 .회담에는 로마넨코. 샵쉰(前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영사).여운형. 김일성. 문(신원 불분명)이 참석했다. 그(여운형)가 관심을 표명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답변이 주어졌다.



제1문제-美.蘇 공동위원회에 대해. 그는 공동위원회 사업을 신속히 재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제2문제-신뢰와 상호관계에 대해. 북조선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됐다. 북조선의 상황에 만족해했다. 여운형과의 회담에 대해 스탈린 동지에게 암호전문을 보냈다 . (9월28일)



▲로마넨코. 여운형은 떠나갔고 38선을 무사히 넘었다.(10월1일)



▲발라사노프(蘇군정 정치고문).여운형으로 하여금 타협을 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10월3일)



▲김두봉(金枓奉.북조선노동당 위원장)은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에게 왜 좌우합작에 동조했으며, 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물었다.(10월22일)



▲로마넨코가 전화했다. 그에게 박헌영(朴憲永.남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 다녀갔는데, 박헌영은(남조선)자치기관 선거에 어떻게 대응하고 어떠한 노선을 취해야 하는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12월11일)



▲남조선입법기관.



지방자치기관에 남조선 좌익의 참여 여부문제.



1.일체의 관련자료와 美군정의 계획을 수집해야 한다.



이 기관들이 어떠한 성질의 기관들인가, 이들의 선거절차와 권한들.



2.남조선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다음과 같은 강령과 선언 하에 행동해야 한다.



①권력은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조선이 해방되던 역사적 시기에, 권력공백의 시기에(인민의 창의에 의해)창출된 권력기구인 인민위원회로 이양되어야 한다.



②각급 인민위원회는 후견인들의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활동해야 한다. 각급 인민위원회는 일체의 지역문제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③선거 시 제기할 정치적 슬로건과 정책목표-토지개혁과 조세개혁, 일제산업기관의 국유화, 남녀평등, 노동법과 사회보장, 조선은 민주공화국이 되어야 한다.



박헌영은 구두로 다음의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는 미국인들이 장기간에 걸쳐 조선을 예속화하려는 목적으로 선거를 실시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혹은 美.蘇공동위원회 사업이 재개됐을 때 도지사들을 공동위원회 사업에 대항시키기 위해. 그는 또한 남조선노동당이 美군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남로당이 유연하게 행동해야 하지만 동시에 미국인들에게 민주화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군사령부를 방문하는 것도 필요하지만,「애국자」라는 명칭의 비합법적인 비밀조직들을 조직해 파괴활동과 삐라를 통한 선동작업을 전개해야 한다.(12월12일)



▲자치기관선거에 좌익진영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내리고, 지시내용을 받아쓰게 함.



다음 문제들을 숙고할 것.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남조선 입법기관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남조선입법기관의 개개 성원들을 사회성분 과 출신별로 파악할 것.(12월14일)



▲로마넨코가 전화했다. 박헌영은 김규식(金奎植.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에 대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문의하고 있다. 그는 이승만과 김구의 정체를 대중 앞에 폭로한 것과 마찬가지로 김규식의 정체도 폭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흥 분하지 말고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고 지시했다. 구체적인 자료 속에서 그의 올바르지 못한 결정들을 근거로 폭로해야 한다.(12월25일)



▲로마넨코가 다음과 같은 문제들로 전화했다. 박헌영과 회담했다. 그는 미국인들에게 어떠한 양보를 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만약 미국인들이 도지사들을 지명하지 않는 데 동의한다면 「인민위원회」의 명칭문제에서 양보해도 좋은가. 만일 50%의 의석을 준다면 입법기관에 들어가도 좋은지를 문의했다.(12월27일)



11. 스티코프비망록 5. 4자회담  ▶ 게 재 일 : 1995년 05월 23일 10面(40版)



47년1월 초 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을 앞두고 김일성(金日成)이 치스차코프대장, 로마넨코 소장과 함께 연해주의 보로쉬로프로 스티코프를 방문해 북한의 정치. 경제 전반에 대해 논의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러한 사실은 스티코프가 자신의『비망록』 에「4者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해 둠으로써 드러났다.



북한의 김일성이 49년3월 정권수립 후 소련을 공식방문하기 이전에도 여러 차례 소련을 방문한 것으로 추측돼 왔으나 자료로 입증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47년1월3일부터 6일까지 계속된「4자회담」은 ▲북한정권 창출의 소련 측 주역인 스티코프. 치스차코프. 로마넨코와 김일성이 만나 당면과제에 대해 깊숙한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 ▲47년 2월북조선인민위원회 수립과 본격적인「사회주의 개혁」 추진을 앞둔 민감한 시기에 열렸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망록』에는 주로 김일성이 요구하거나 제안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돼 있고, 이에 대한 스티코프의 대답이나 지시사항은 소략하다. 이때 논의된 내용은 크게 4가지 사항이다.



첫째는 재정지원문제다. 김일성은 북한경제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6억원의 추가 재정지원과 일용필수품. 군수품등의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둘째는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 소집문제다. 북한은 46년7월22일 북한지역의 각 단체. 정당들을 망라해 북조선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고, 8월말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 신민당을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창당한 후 이를 기반으로 제일 먼저 인민위원회선거를 계획했다. 이에 따라 9월5일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2차 확대위원회는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그해 11월 북한은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정권창출의 순서를 차례로 밟아나갔다. 인민위원회 선거가 끝나자 북한은 북조선 전체를 망라한 인민회의를 소집,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임시」를 떼고 정식 북조선 인민위원회로 바꾸는 절차에 착수했다. 「4자회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망록』에 따르면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대회 소집과 일정, 대회 보고자와 보고내용에 대한 결정이 여기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47년2월초 열린 북로당 정치위원회, 조직위원회에서 인민위원회 대회 소집문제를 토론했으며 이 자리에서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2월17일에 열기로 결정했다는 북한의 주장을 뒤엎는 것이다.



셋째는 인민경제발전계획 작성문제다. 남쪽지역이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에 휩싸여 경제상황이 악화일로에 있을 시점에 북한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토지개혁. 노동법 개정 등을 마무리하고 경제계획 수립을 본격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듯이 북한은 국가계획을 수립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고, 이것의 해결을 위해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북한의 대표적 역사서인『조선전사』는 김일성이 민족역사상 처음으로 47년 인민경제계획을 작성하고 47년2월19일에 열린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대회에서 발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비망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인민경제계획 작성과 정에서 세세한 부분까지 소련과 논의했다. 사실상「4자회담」에서 경제계획의 윤곽이 확정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넷째는 박헌영(朴憲永.남조선노동당부위원장)의 합법화와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 지도부 창설문제다.「4자회담」에서 스티코프는 박헌영을 합법화시키는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박헌영이 월북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를 북쪽에서 활동하게끔 하자는 의도였다. 이렇게 될 경우 박헌영은 남쪽에서 더 이상 활동하기가 어렵게 된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이것은 박헌영이 계속 남로당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남쪽「혁명운동」에만 전력하도록 하려는 김일성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4자회담」에서는 남로당과 북로당의 단일 지도부 구성문제가 다시 논의됐고, 구체적으로 지도자문제까지 논의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러 계파간의 이해관계가 얽혀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유보됐음을 알 수 있다.이 문제 는 49년 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김일성이 당위원장으로 선출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와 같이「4자회담」에서 논의된 사항은 47년 북한정치. 경제상황 뿐만 아니라 이후 남북노동당간의 현안으로 등장한 통합지도부문제까지 광범위한 것으로 이 시기 소련과 북한관계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2. 스티코프비망록 5. 일지 ▶ 게 재 일 : 1995년 05월 23일 10面(40版)



▲치스차코프(蘇25군사령관)에게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 김일성(金日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과 1947년 1월3일 보로쉬로프로 출발하라고 명령.(1947년 1월2일)



▲치스차코프와 로마넨코를 접견했다. 김일성이 회담에서 어떤 문제들에 대해협의하기 원하는지 알아보았다. 회담 시각을 21시로 정했다.



치스차코프. 로마넨코. 김일성과 회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제기했다.



1.우리에게는 국가계획을 수립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1947년의 인민경제발전계획을 세우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철도운수. 해상운수 부문이 우리의 애로점이다. 비료와 양곡을 수송하지 못하고 있다.



조소(朝蘇)합작회사-해상운수회사, 석유정련회사-설립문제를 신속히 해결할 것이 요청된다. 우리는 협정초안을 심의하고 이에 동의했다. 협정에 서명할 전권위원으로 강양욱(姜良煜.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국장)을 뽑았다. 우리에게는 많은 양의 코크스용 석탄이 필요하다. 1947년도 분으로 약 15만t이 요구된다. 그러나1946년도 계획조차 이행되지 않았다.



재정부문에서 우리는 추가적으로 약 6억원이 필요하다. 일용필수품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자금을 동원할 가능성이 제한되고 있다.



군대에 납품된 자동차와 무기는 질이 나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주민들 사이에서 일용필수품 부족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물가가 치솟았다.



군대에 피복을 지급해야 한다. 많은 병사들이 헐벗고 있다. 모포1만장(46만루블), 각반 7천개(3만2천7백60루블), 군화 7천족(45만5천루블) 총계 94만7천7백60루블 상당의 군수품이 필요하다. 주민들과 열성분자들은 정부 수립을 원조할 미소공동위원회 사업이 언제 재개될 것인지를 빈번히 묻고 있다. 당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며 당신들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 상기 질문들에 대해 설명, 답변했다.(1월3일)



▲치스차코프. 로마넨코. 김일성을 접견했다.



1.북조선 도. 시. 군(郡) 인민위원회대회 소집문제  김일성. 북조선 지도부는 대회소집과 일정에 동의한다. 성공적으로 치러질 것이다. 나는 김일성에게 대회소집과 대회에서 논의될 문제들이 향후조선의 민주화사업에서 갖는 의미를 설명했다. 김일성이 조선의 정치정세에 대해 보고하고, 기획국장이나 김두봉(金枓奉.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부위원장)이 인민경제발전계획 예정수치에 대해 보고하기로 협의했다.



또한 각 정당의 대표자들과 노동자. 농민. 상인. 자본가계층의 대표자들이 모두 포함되도록 인민회의를 선거하고, 정부의 향후 사업전망을 잘 고려하여 각 행정국들의 상을 선발하기로 협의했다.



2.인민경제발전계획 작성문제 코르쿨렌코. 즐라토프스키 등이 배석했다. 공업생산계획을 살펴보았다. 공업생산계획 작성 방법에 대해지시했다.생활필수품.농업용구.비료를 시장에 최대한으로 방출하는데 주의를 집중시키도록 촉구했다.



농업과 축산, 북부지역의 파종면적을 확대시키는 문제, 농업의 기계화, 농업용구의 정착에 관해 논의했다. 양잠업의 발전과 관개시설에 대해서도 토론했다. 농업현물세의 세율을 개정하는 문제에 대해협의했다. 남부지역에서는 증가시키고 북부지역에서는 감소시킨다. 이사업을 농민동맹의 발의로 시작한다.



面.里인민위원회 선거문제를 점검했다. 선거는 리 인민위원회부터 시작하고, 선거일은 47년 2월25일로 잡는다. 면인민위원회 선거일은 3월 5일로 잡는다. 인민들은 이 조치를 환호할 것이다.



박헌영을 합법화시키자는 문제가 나에 의해 제기되었다. 김일성은 그렇게 할 경우 박헌영은 남한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긍정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남북조선노동당의 단일한 지도부가 창설되면 누가 지도자가 될 것인가? 김두봉 혹은 허헌(許憲.남로당위원장),그들 사이에 알력이 싹틀 것이다. 만약 박헌영을 지명하면 김두봉이 반대할 것이며, 허헌은 어떻게 처신할지 알 수없다. 일정시간이 지난 뒤 이 문제를 재검토하기로 약속했다.



〈회담계속〉 노동당원 교육용 교재편찬 계획에 대하여. 나는 교재와 교재의 집필계획에 대한 나의 관점을 설명했다.



소련군 규약의 조선어 번역에 대해. 조선어판 군사용어사전 편찬문제에 대해 숙고할 것.



무기수리 공장에 대하여. 나는 이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남조선정세. 남조선에서 무장대오들이 탈주하고 있다.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무장해제시켜 조사하고 잠시 동안 붙잡고 있다가 남조선으로 귀환시키거나 또는 억류 하라고 답변했다. 이들에게 무엇을 도와줄 수 있겠는가. 급양, 돈.



남조선을 위한 지하신문에 대해. 임시적으로 출간이 중지되었다.



(1월4일)



▲휴일. 로마넨코. 김일성과 함께 객차에 머물렀다. 저녁때 영화『적들』『석화』를 보았다.좋은 영화들이다.(1월5일)



▲공항에서 로마넨코와 김일성을 전송했다. 김일성과 대화중 대회에서 보고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1월6일)



▲로마넨코. 인민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선거실시에 대한 결정서를 채택하고, 중앙선거위원회를 조직했다.(1월7일)



13. 스티코프비망록 6. 북한 사회상(일지 포함) ▶ 게 재 일 : 1995년 05월 25일 10面(40版)



김일성종합대학이 설립된 첫해의 교사 현황과 개설된 교과목 내용이 수록돼 매우 흥미롭다.蘇군정이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설치와 북조선노동당 정치교양교재계획안 작성, 그리고 교과서 편찬계획수립과 서술목적까지 지시한 사실은 蘇군정이 북한교육의 기본틀까지 정했음을 의미한다.



또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 등의 저서들을 번역토록 한 것도 북한 정치사상교육에 蘇군정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일성종합대학 교사 현황.8백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와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아파트가 있다. 학생선발 -제1학년 1천3백40명. 2천5백명의 입학정원서가 수북이 쌓여 있다.(9월 7일)



▲로마넨코. 무용가 최승희에 대해. 무용학교 1백명, 46년 9월 7일 최승희 무용연구소 연구생 45명 첫 입소식을 거행.(9월 16일)



▲로마넨코. 김일성종합대학에 대해. 모든 학부에서 다음과 같은 일반교과목이 개설됐다.러시아어.세계사.철학.다위니즘.정치경제학.(10월 3일)



▲로마넨코에게 지시하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 조선역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권고할 것.(12월6일)



▲크라프초프를 호출해 북조선노동당의 정치교양교재 작성계획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교과서 편찬계획. 교과서는 간단하게나마 다음과 같은 내용 서술에 대한 목적을 밝혀야 한다. 조선의 지리적. 역사적 과거, 독립을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 일본인 들의 지배와 착취. 교과서는 일제 압제로부터 해방 이후 북조선의 정치적 고양기와 민주개혁의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12월26일)



▲판쉰. 추르코프. 오진초프. 표도로프를 호출했다. 노동당 교재 편찬계획을 그들에게 알리고,46년 12월30일까지 이에 대해 보고하도록 했다.(12월 27일)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의 저작을 조선어로 번역. 레닌의『무엇을 할 것인가』『일보전진 이보후퇴』,마르크스.엥겔스의『공산당선언』,스탈린의 저서를 번역할 것.(12월 30일)



14. 스티코프비망록 7. 토지개혁, 공업등(일지포함) ▶ 게 재 일 : 1995년 05월 25일 10面



북한 농민들은 1946년 3월 5일 공포돼 3월말에 완료된 토지개혁에 비교적 만족했음이 드러났다. 또 수확의 25%를 납부하는 농업현물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그러나 토지의 비옥도를 고려하지 않은 일률적인 세금 부과와 각종 세금, 열악한 형편 등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시했다.46년 11월 실시될 도. 시. 군 인민위원회선거를 앞두고는 처음 치러보는 선거가 너무 생소해 선거제도 자체에 의아심을 품는 북한 농민들의 모습도 묘사돼 있다. 토지 몰수를 두려워하는 지주들의 불안감도 엿보인다.



▲농민들의 동향은 좋은 편이다. 특히 토지개혁과 수확의 25%를 납부하는 농업현물세에 대한 반응이 좋은 편이다.(46년 9월 6일)



▲농업현물세에 대해. 농민들은 25%의 현물세에 찬성하고 있다. 그러나 농민들이 분배받은 토지의 비옥도에는 차이가 있고 비옥하지 않은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에게, 특히 산간지대의 화전민들에게는 불만이 존재한다. 많은 농민들이 좋지 않은 형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다른 세금들, 특히 학교세에 대해 그러하다.(10월 22일)



▲선거에 대해. 지주들의 동향. 지주들은 토지를 다시 몰수할 것이라는 선전을 해대고 있다.(10월7일) 소련이 북한에서 가져간 산업시설의 수와 이를 환산한 금액이 부분적이나마 비망록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또 소련은 북한에서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김일성(金日成)과의 회담에서 朝蘇합작회사 설립을 서둘렀다.



그러나 북한의 공업발전 방향을 놓고 소련군지도부 사이에는 소련에 유리하도록 방향을 잡아야 한다는 주장과 북한의 어려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서로 맞섰다. 이같은 사실들은 비망록에서 처음 공개됐다.



▲니콜라예프. 코르클렌코. 중공업기업소 121.양도되고 있는 모든 산업기업소와 철도. 운수기관의 가격은 약 5억원.(46년 9월8일)



▲로마넨코(蘇軍 민정사령관).인쇄설비에 대해. 1945년 가격으로 총계 6천1백만원에 달하는 6개의 기업소가 양도됐다.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흥남화학콤비나트의 양도를 미룰 것.(9월16일)



▲김일성(북조선노동당 부위원장)과 통화했다.



朝蘇해상운수회사와 원산석유정련회사 설립문제를 신속히 매듭지을 것을 논의했다.(10월 2일)



▲로마넨코에게 전화걸다. 철도운수상황이 매우 열악하다. 겨울용 연탄을 제조할 타르가 없다. 3천t이 필요하다. 후르소프. 석탄이 없다. 기관사들의 사보타주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석탄이 없다는 구실로 기관차 6량의 불을 꺼버렸다.(12월6일)



▲메레츠코프(극동군 제1전선군사령관)와 북조선 공업생산계획과 그 발전에 대해 논의했다. 그는 북조선의 공업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슬라트코프스키는 소련에 북조선의 목재와 비료를 공급하는 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했다. 나는 북조선에서 많은 비료를 가져가는 것에 반대했다. 왜냐하면 조선인들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무역협정에 대해서도 슬라트코프스키에 동의할 수 없다.(12월18일)



소련군사령부는 45년 10월「대내 치안」이라는 명목 하에 북한의 각 도에「보안대」를 조직해 이를 무장화하기 시작했다. 해방 1주년을 맞는 46년 8월15일에는 평양에「보안간부 훈련대대부」를 설치했는데, 이듬해인 47년 5월17일「북조선 인민집단군사령부」로 개칭됐다.



비망록은 46년 9월 당시 북한의 일부 군부대의 병력과 소련 군사고문의 수를 밝히고 있다. 또 군부대에 대한 보급 및 위생상태가 매우 열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문으로만 전해졌던 북한주민들에 대한 소련군 의 난폭행위와 폭력행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도 주목할 만하지만 이를 소련군사령부가 엄단하려고 한 점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끈다.



▲군부대들에 대한 문제들. (1)철도경비대-정원3천9백84명, 현재 약 2천명(2)경보병사단-정원 9천9백57명, 사단장을 선발, 연대와 대대의 지휘관과 부지휘관들-8백15명. 소련군사고문-1백79명, 통역관-10명(46년 9월 7일)



▲조선의 군대에 대해. 조선군 업무를 누가 관장해야 하는가.(10월22일)



▲로마넨코에게 전화걸다. 조선인들로 조직된 군대의 보급상태가 열악하다. 피복과 군화가 지급되지 않고 있다. 탈주병이 생기고 있다. 소련군대 보급품 중 5천족의 군화와 모포를 지급했다.



▲군용열차에서 우리 군인들이 하차해 주민들에게 난폭하게 굴고 약탈행위를 하는가 하면 살인까지 자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련 병사와 장교들의 난폭행위와 약탈행위에 대해 보고할 것.(12월25일)



▲쉘라호프. 북조선 주민들에 대한 우리측 병사들의 무례한 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제25군 명령서에 서명했다. 동계군사훈련에 대한 스탈린 동지의 명령서들을 가져왔다.



15. 스티코프비망록 8. 汎기독교 선거불참운동(일지 포함) ▶ 1995년 05월 25일 10面(40版)



46년 11월3일 북한에는 도. 시. 군 인민위원회선거가 실시됐다. 비망록은 이 선거를 앞두고 북한의 기독교 목사들과 蘇군정 및 김일성간에 팽팽한 갈등이 빚어진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목사들은 선거가 일요일에 실시되는 점 등을 들어 선거일 연기를 주장한 반면, 김일성은 목사 출신이자 자신의 친척인 강양욱(康良煜)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등 일부 목사들을 회유해 기독교 분리파위원회를 조직해 선거 참여를 권유했다.



선거 직전에는 천주교 신부들까지 가세한 선거 불참운동이 汎기독교적으로 전개됐음을 비망록은 보여주고 있다.



▲선거계획. 선거에 대한 목사들의 설교를 촬영할 것.(10월 22일)



▲로마넨코. 개신교 목사들이 찾아와 대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이 채택되었다고 전해왔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할 것. 신자들은 정치활동과 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



학교에서 반종교 활동을 실시하지 말 것. 선거일을 연기하든지 투표를 11월 4일에 실시할 것. 그는 그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했고, 선거는 인민위원회의 사업이라고 언명했다.(10월 25일)



▲김일성을 접견하다. 오전 9시에 개신교 대표 8명이 김일성을 방문했다. 그들은 인민위원회가 항상 기독교 신자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개신교의 종교적 제일(祭日)인 일요일에 정치적 행사를 치르고 있다고 진술했다. 그들은 11월 3일의 인민위원회 선거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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