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한광덕 작성일 : 2015-05-29 조회수 : 1766
스티코프(Shtykov)비망록


스티코프(Shtykov)비망록



 소   개   말   씀



** 스티코프는 45년 4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  김일성을 픽업한 인물이며, 美蘇 공동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46-47년),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년)을 거쳐 북한주재 초대 소련 대사(48~51년)를 역임한 당대 최고의 북한 실권자였음.



** 스티코프 비망록은 46년 8월부터 11월까지 4개월간의 일기형식 기록으로서  박헌영을 비롯한 남북의 좌익들을 그의 뜻대로 움직인 일면을 볼 수 있음.



** <펌>으로 올리는 이 자료는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의 이동현(?) 박사가 발굴 번역, 중앙일보 홈페이지에 올린 것을 필자가 ‘4.3위원’으로 활동 시 Down 받아 참고자료로 활용했던 내용임. (청색 혹은 밑줄은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자 표시한 것임)



** 이 자료가 최근 중앙일보 홈페이지에서 사라진 것을 발견한 필자는 그 이유를 문의 했으나  답을 얻을 수 없어 이 사실과 함께 자료의 내용도 시급히 전파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자유대한민국을사수하기 위하여”의 제목 하에 <펌>의형식으로  http://www.vietnamwar.co.kr의 인강칼럼에  올리고 몇 개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는 것임.



** 당시 남북의 제 정당이 북로당(북조선 노동당)과 남로당(남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는 과정의  스티코프 역할을 개관하고 그의 역할이 오늘 현재, 북한의 누구에게 승계되었을까를  생각하며, 휴전선을 넘나드는 남북의 인물들을 관심 있게 살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람.


2007. 5. 24. 인강



















 스티코프 비망록


 


<바로가기 목록>































1.  스티코프는 누구인가


2. 9월총파업과 10월폭동


3. 스티코프비망록 1. 일지


4. <인터뷰>스티코프 장남 빅토르씨


5. 스티코프비망록 2. 3당합당


6. 스티코프비망록 2. 일지


7. 스티코프비망록 3. 3당합당


8. 스티코프비망록 3. 일지


9. 스티코프비망록 4. 좌우합작 추진 말라


10. 스티코프비망록 4. 일지

























11. 스티코프비망록 5. 4자회담


12. 스티코프비망록 5. 일지


13. 스티코프비망록 6. 북한 사회상(일지 포함)


14. 스티코프비망록 7. 토지개혁, 공업등(일지포함)


15. 스티코프비망록 8. 汎기독교 선거불참운동(일지 포함)


16. 스티코프비망록 발굴 의미


17.스티코프비망록 나는 이렇게 본다


18. 스티코프비망록 나는 이렇게 본다


19. <스티코프비망록> 전문가회담


 



1.  스티코프는 누구인가   ▶게 재 일 : 1995년 05월 09일 10面(40版)


45년 4월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부임하면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스티코프는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년), 북한주재 초대 소련 특명전권대사(48~51년)를 지냈다.


북한에서의 경력에서 보듯 북한정치문제를 담당하면서 북한정권수립(48년)과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권수립이후에는 특명전권대사를 맡는 등 사실상 북한 최고 실력자다. 그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등 북한의 정치지도자 뿐 아니라 남로당 등 남쪽 좌익까지 떡 주무르듯 했고 북한의 모든 것이 그의 지시대로 움직였다.


1,2차 美蘇공동위원회(46년 3~5월,47년 5~8월) 소련 측 수석대표로 나서 美군정과의 협상에서도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한 스티코프는 한국에오기전 38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2비서, 39년 소련. 핀란드전쟁시기에 제7군 군사평의회 위원, 43년 볼호프스키 전선 군사평의회위원, 44년 카렐스키전선 군사평의회위원 등을 역임했다. 군인이면서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노련한 정치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56~61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 63년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당국가검열위원회 부위원장 등 당 경력도 화려하다. 64년 휴가차 레닌그라드에 갔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2. 9월총파업과 10월폭동   ▶게 재 일 : 1995년 05월 09일 10面(40版)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한 『스티코프 비망록』은 북한정권 수립 기에 북한의 최고실권자였던 스티코프가 그날그날 있었던 구상과 생각들을 꼼꼼히 일기형식으로 적어놓은 중요 사료(史料)다.


이 비망록은 스티코프를 정점으로 한 소군정이 북 한을 이미 완전히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은데 이어 남한 정세에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을 명백히 밝혀주고 있다.『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런 점에서 북한정치사는 물론 남한정치사의 또 다른 이면적 진실을 밝혀주는 실마리를 제공한 셈이다.


따라서 비망록은 기존 가설을 문서로 입증해주거나 전혀 새로운 사실을 밝혀준다는 점에서 해방정국에서 매몰되고 유실된 우리역사를 복원, 한국 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고 있다.


이로써 중앙일보는 지난해 12월 소25군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에 이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스티코프 비망록까지 발굴함으로써 북한정권수립의 내막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게 됐다.『스티코프 비망록』의 주요 내용을 주제별로 분류, 6회에 걸쳐 해설과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


1946년 9월 좌익계열의「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全評)」가 주도한 9월 총파업 때 북한의 蘇군정이 2백만엔을 , 뒤이어 발생한 10월 폭동때는 3백만엔의 자금을 지원한 것은『스티코프비망록』에서 처음 밝혀진 사실이다. 이는 당시 남한정세 에 소련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까지 9월 총파업은 조선공산당 지시에 따라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왔다. 10월 폭동에 대해서도 일부 학자는 조선공산당의 개입사실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9월 총파업이 조선공산당의 지시 차원을 넘어 蘇군정의 지시에 따른 것 이고, 10월 폭동에도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蘇군정까지 직접 개입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그동안 조선공산당과 소련의 개입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킨 셈이 됐다.


9월 총파업은 46년 7월 조선공산당이 美군정에 대한 종래의 우호정책을 철회하고 美군정의 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강력히 전개하기 위해 채택한 신 전술의 구체적인 행동표현이었다.


신 전술이 채택된 같은 달 중순 전평 상무위원회는 당의 신 전술 지령에 입각해 46년 10월 파업투쟁을 전개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이 계획을 바꿔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지시했다. 김남식(金南植.평화연구원)연구위원은『조선공산당이 美군정 운수부가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기로 한 기회를 이용하려 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비망록은 이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총파업일정을 앞당긴 결정은 바로 蘇군정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이다. 비망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46년 9월9일 박헌영(朴憲永)은 黨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했다.』이에 대해 스티코프는『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비망록에는 스티코프의 이런 지시가 9 월11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내려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전평 지도부의 긴급회의가 9월10일 소집돼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길 것을 결정한 점으로 미뤄 볼 때 아마도 스티코프의 지시는 박헌영이 이 문제에 대해 질의한 9월9일이나 아니면9월10일 이른 아침에 하달됐을 가능성이 크다.


계획대로 총파업은 46년 9월23일 부산철도 노동자 7천여명이 일급제 반대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감으로써 불을 댕겼다.


다음날 서울을 비롯한 全철도종업원 4만명이, 9월25일에는 출판노조가, 연이어 전신관계 종사자들이 동조파업을 단행함으로써 파업여파는 각 부문으로 확산됐다.


총파업 기간에 대한 비망록 내용 중 주목을 끄는 대목은 蘇군정이 총파업이 최고점에 달한 9월26일과 28일 두 차례나 파업투쟁 방향을 지시한 점이다.


특히「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등 정치문제를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이를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은 총파업을 정치투쟁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蘇군정이파업투쟁 자금으로 2백만엔을 긴급 지원한 사실 역시 파업투쟁을 고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다.


총파업이 각 지역에서 계속되는 가운데 10월1일 대구에서는 1천 여 명이 식량 배급을 요청하며 시위를 벌였다. 파업노동자 등의 가세로 시위가 점차 확대되자 경찰은 진압을 위해 발포했다. 이 와중에 시위군중 한명이 숨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


다음날 흥분한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를 탈취하는 등 극렬 행동을 서슴지 않자 美군정 당국은 대구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미군을 출동시켜 소요를 진압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부터 시위는 대구인근 지역으로 번졌고 급기야 11월 중 순까지 경북전지역과 경남 강원. 전남 등지에서 계속됐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교량. 철도가 파괴됐으며 우체국 등이 방화돼 통신망이 두절 됐다. 왜관에서는 경찰서장을 비롯한 수명의 경찰관이 학살됐다.


그러나 시위는 美군정과 경찰, 그리고 우익단체들의 적극적인 진압노력으로 11월 중순을 고비로 그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이제까지 일부 학자는 10월 폭동에 조선공산당 지도부가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주장해 왔다. 그러나 비망록은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물론 蘇군정까지 10월 폭동에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망록에 따르면 10월 폭동이 시작된 그 다음날 스티코프는 남조선 투쟁기금으로 3백만엔을 보낼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趙斗元)은 폭동이진행중인 10월21일 蘇군정에 대해『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이런 사실들은 10월 폭동 역시 조선공산당이 상황전개에 따라 蘇군정과 교감을 가지면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3. 스티코프비망록 1. 일지   ▶게 재 일 : 1995년 05월 09일 10面(40版)


▲박헌영은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문의하고 있다(46년9월9일)


▲남조선 정세와 지원조치. 로마넨코 .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항의집회를 조직할 것(46년 9월11일)


▲북조선에서 남조선으로 반입할 출판물을 증대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대중적인 시위와 항의를 조직할 것. 미군정과 남조선 반동파의 행동을 폭로하는(46년 9월16일)


▲레베데프에게 전화 걸었다. 남조선 좌익의 활동방향에 대해(46년9월21일)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하다.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좌익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로마넨코. 4만 명의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에 돌입. 남조선에서는 파업투쟁이 진행 중이다. 철도종업원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9월 25일 오후부터 출판인쇄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됐다(46년9월26일)


▲로마넨코. 남조선에서 파업투쟁이 확산되고 있다. 학생들이 파업투쟁에 합류했다. 요구조건의 관철범위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경제적인 제 요구,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권력의 양도 요구를 잠시 철회. 5백만엔을 요청하고 있다. 재정지원을 위해 2백만 엔을 지급.


남조선 파업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경제적인 제 요구,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 미군정에 의해 폐간된 좌익신문들의 복간, 공산당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 철회 등의 요구가 완전히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할 것. 이 요구가 충족될 때 파업투쟁을 중지할 것. 인민위원회에 권력을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미군정과 협상을 지속할 것이라고 성명할 것(46년9월28일)


▲남조선 사태에 대한 북한의 반응. 남조선 인민들에게 동참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집회 개최와 남조선 인민을 지원하기 위해 매일 두 시간씩 노동시간을 늘려 그 임금액을 남조선 지원기금으로 공제하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서울 에서 시위를 시작할 예정이다. 3백만엔을 더 요청하고 있다. 불가닌에게 전화하다. 우리의 (남조선)동지들에게 3백만엔의 재정지원을 제공하는 문제 및 집회개최와 공제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듣다(46년10월1일)


▲3백만엔의 지원과 집회개최를 위해 작업시간을 단축하는 문제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46년10월2일)


▲46년10월6일 박헌영이 남한을 탈출해 북한에 도착했다. 박헌영은 9월29일부터 산악을 헤매며 방황 했는데, 그를관에 넣어 옮겼다. 박헌영이 휴식을 취하도록 지시했다(46년 10월7일)


▲부산에서는 농민들의 진출이 시작됐다. 지금 파업운동은 어느 정도 축소됐다. 조선공산당 중앙위원 조두원은 향후 투쟁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문의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빨치산부대들이존재하고 있으며, 반동진영과 민주진영 사이에 전투가 전개되고 있다. 그는 빨치산투쟁을 본격적으로 개시해야 할지 혹은 자제해야할지를 문의하고 있다. 박헌영. 파업투쟁은 폭동으로 성장 진화했다.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식량과 탄약이 부족하다. 그들의 향후 투쟁방침에 대한 교시를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에 농민 투쟁이 개시될 수 있다(46년10월21일)


▲발라사노프와 샵쉰을 호출해 남조선 정세에 대한 그들의 정보보고를 청취했다(46년10월22일)


▲김일성. 박헌영과 회담할 것. 회담 때 남조선에서 전개되고 있는 제반 사태에 대한 평가를 전달할 것(46년11월4일)


▲문(정체불명)은 박헌영에게 39만엔이 지출됐다고 보고했다. 더 지급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46년12월6일)


▲로마넨코. 그의 계좌에 있는 1백22만루블에 대해 논의했다. 그 돈을 박헌영에게 전달하고 계좌를 정리할 것을 명령했다(46년12월7일)


4. <인터뷰>스티코프 장남 빅토르씨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1일 09面(40版)


중앙일보 현대사 자료 발굴 팀이 7개월간에 걸친 수소문 끝에 찾아낸『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의 장남 빅토르(61)의 집 차고 먼지더미에 파묻혀 있었다.  안성규 모스크바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등 본사자료 발굴 팀은 빅토르를 끈질기게 설득, 비망록을 본사에 기증하게 됐다. 한국현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귀중한 사료가 비로소 빛을 본 순간이었다.


자료팀은 아버지의 화려한 삶과는 달리 평범한 노동자로 쓸쓸히 노후생활을 보내고 있는 빅토르를 만나 아버지 스티코프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습니까.


▲아버지가 연해주군관구 군사평의회위원으로 북한문제에 깊이 개입하셨고 초대 북한주재 소련대사를 지내셨다는 사실 외에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제가 너무 어렸을 때니까요.


-아버지가 자료를 많이 남겼다고 들었습니다.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버지는 앨범. 문서. 노트. 사진들을 많이 남기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 뒤인 66년 북한에서 사람들이 찾아와 어머니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자료들을 거의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자료유실이 어느 정도입니까.


▲86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부터는 모든 자료를 제가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이사를 40번이상이나 다녀야 했고 제가 이 분야를 잘 알지 못해 관리를 소홀히 하는 바람에 상당한 양이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아버지는 평소 심장병을 앓았지요. 아버지는 64년 여름휴가를 레닌그라드에서 보냈는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이날도 시내 러-일전쟁 기념비를 촬영하러 가다가 네프스키 프로스펙트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 같이 있던 당시 운전사 의 말에 의하면 심한 증세는 아니었는데 그날이 일요일이라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는 바람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평양을 다녀오신 적이 있습니까.


▲47년 2차 미소공위가 진행 중일 때 여름방학을 이용해 아버지와 함께 평양과 서울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평양과 서울 모두작지만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한국이 어째서 아직도 합쳐지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일기가 공개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광일 뿐입니다. 지면에 공개되면 꼭 보내주십시오.


빅토르 스티코프는 중령까지 군 생활을 하다 아버지가 외무부고문으로 있을 때 퇴역, 열차운전사로 일했다. 얼마 전 은퇴하고 지금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는 부인 잉가 니칼라예브나(61)와 함께 상트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의 두칸짜리 아파트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페레스트로이카가 몰고온 생활고 때문에 연금으로는 모자라는 생활비를 벌 기 위해 열차관리소에서 야간수위를 하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안성규 특파원. 전현수 연구위원]


5. 스티코프비망록 2. 3당합당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1일 09面(40版)


9월 총파업과 10월 폭동을 두 달 앞둔 1946년 7월 남북 좌익세력의 새로운 판짜기가 시작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 동당(남로당)을 결성하는 작업이 추진된 것이다. 공산당이 유일집권당으로 등장해 사회주의화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고, 남에서는 흩어져 있던 좌익세력들을 통합해 구심점을 형성한 후 美군정과 본격투쟁에 나서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북로당의 결성은 蘇군정의 후원을 받아 8월 말 순조롭게 완성됐지만, 美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남로당결성은 예정보다 3개월이나 늦게 이루어졌다. 그만큼 좌익 3당 합당을 통해 남로당이 결성되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 을 겪어야 했다. 3당 합당이 지연되자 蘇군정 최고지도부와 북로당은 합당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직접 남쪽 정치상황에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발굴한『스티코프 비망록』은 이러한 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준다. 3당 합당 과정에 蘇군정이 직접 개입했음이 문서로 처음 밝혀진 것이다.


남쪽에서 3당 합당은 박헌영(朴憲永)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46년 7월12일 서울로 돌아온 직후 갑작스럽게 여운형(呂運亨)에게 좌익 3당 통합문제를 통보하면서 시작 됐다. 이 소식을 들은 여운형도 7월말 북쪽의 진의파악을 위해 급거 평양을 방문했다.


8월 3일 인민당은 합당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산당. 신민당에 합당제안문을 발송했다. 이에 공산당과 신민당이 즉시 합당교섭을 개시하자는 회답을 보내면서 3당 합당이 구체화됐다. 그러나 蘇군사령부. 북로당의 지시에 따라 순조롭게 출발한 합당작업은 잠재돼 있던 공산당 내부의 갈등이 폭발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반전(反轉)됐다.


8월5일 이정윤(李廷允). 강진(姜進)등 反박헌영派 간부 6인이 합당을 하기 전 당대회를 열고 지도체계를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반대파를 제명. 무기 정권시켰다. 이후 당대회 소집을 둘러싼 논란이 확대되면서 공산당은 완전히 두 파로 갈라졌다.


이렇게 되자 인민당과 신민당도 합당을 신중하게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좌익3당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상태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박헌영은 9월4일 합당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3당 합당을 추진해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당수 백남운(白南雲)등이 반발하자 3당 합당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당황한 蘇군정의 움직임도 바빠졌다.『스티코프비망록』은 스티코프가 9월10일 북로당위원장 김두봉(金枓奉)을 호출해 남쪽의 3당 합당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한 사실을 보여준다. 밀사를 파견해 남쪽의 정세를 파악한 사실도 드러났다.


스티코프는『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하여 잠잠해졌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박헌영 반대파들은 9월 총파업 진행 중인 28일 당 대회 준비모임을 갖고 총파업반대와 당대회 소집을 주장했다. 다른 당의 대표들도 평양의 소련군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박헌영의 독선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비망록』은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 고찬보와 여운형의 평양방문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스티코프는 9월23일부터 30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여운형에게 각별히 신경을 썼다. 여운형은 새로 만들어진 남로당의 당수로 내정돼 있었다. 스티코프가 여운형에게 북조선 지도자들과의 회담을 허용하고 북조선이 그를 신뢰하고 있다고 말 할 것을 지시한 것은 여운형이 정치력을 발휘해 좌익정당 내부의 분열을 수습해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또 비망록은 신민당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합당에 비판적인 백남운을 물러나게 하고 합당에 적극적인 정노식(鄭魯湜)을 신민당 위원장으로, 무소속이며 박헌영 지지자였던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작업이 蘇군정과의 교감 속에서 추진되었음을 보여준다. 10월 7일 이그나치예프 대령은 합당사업이 道수준까지진척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10월 16일 백남운. 강진등 박헌영의 독주에 반대하는 세력이 남로당과는 별개로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3당 합당은 두 갈래로 추진되는 혼선을 빚게 된다. 좌익세력의 단결을 위해 추진된 3당 합당이 분열의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6. 스티코프비망록 2. 일지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1일 09面(40版)


▲김두봉(金枓奉.북로당 위원장)을 호출하다. 남조선의 정세 ,남조선 3당 합당 문제 및 지원대책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다.(46년9월10일)


▲보로실로프에서 로마넨코(蘇軍民政사령관)와 남조선정세에 대해 전화 논의. 아널드(美군정장관)가 여운형(呂運亨.조선인민당 당수)을 호출해 미군사령부는 남조선 좌익3당의 통합을 현재로서는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언명했다.(9월16일)


▲로만넨코 보고. 남조선에서 9월12일 밀사가 도착했다. 여운형은 아마도 곧 합당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할 것으로 보인다. 백남운(白南雲.남조선신민당 당수)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분파주의자들은 북조선의 압력과 관련해 잠잠해 졌다. 이강국(李康國.남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사무국장)은 자신의 거처와 관련해 북조선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만일 합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남조선에 좌익3당을 그대로 존속시킬 것을 요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지도자, 여운형과 백남운이 반대한다면 합당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9월19일)


▲로마넨코. 오늘 남조선신민당 중앙위원회가 김일성(북로당 부위원장)을 방문했다. 그들은 변장을 하고 머리. 수염 등을 깎았다. 찬보(高贊輔)는 신민당 중앙위원이자 인민당 중앙위원이다. 그는 3일간의 일정으로 북조선을 방문했다. 그는『나는 북조선에 의지하고 있지만 북조선은 나를 신임하지 않는다. 나는 좌익이다. 미군정은 나를 못살게 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당분간 통합을 추진하지 말 것을 제기했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에 입당하고 있는데, 그들이 합법적으로 활동하게끔 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또한 박헌영(朴憲永.조선공산당 당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박헌영이 무엇인가 일을 추진하면 10일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는 것이다. 박헌영은 그에게 3명의 지도자를 추천했는데 이중 2명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내가 졸(卒)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신의 서신들을 접수했지만 나는 그것들을 당신의 서한으로 믿지 않았다』고 말했다. 스탈린 동지 앞으로 암호전문을 보내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령을 요청했다(9월21일)


▲로마넨코 보고. 김일성과 여운형의 회담이 있었다. 여운형은 재차 소련군사령부 지도부와의 회담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여운형에게 어떠한 답변을 줄 것인가에 대해 지시를 하달(9월25일)


▲로마넨코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들을 하달했다.


-북조선 지도자들과 여운형의 회담을 허용할 것.


-남조선 좌익3당의 합당을 잠시 중단할 것.


-공산당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은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체포명령의 취소, 감옥으로부터 좌파의 석방, 테러중지를 요구할 것.


-북조선의 상황과 북조선에서 실시되고 있는 민주주의적 제 개혁에 대해 설명해 줄 것. 북조선은 여운형을 신뢰하고 있다고 말할 것.


로마넨코 보고. 崔(신원불명)와 중앙위원회 위원 2명, 김일성, 김두봉, 영하(朱寧河.북로당부위원장), 장주익, 허가이(許哥而. 북로당 조직부장)등 회의.


인민당과 신민당 두 정당의 합법성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공산당은 지하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崔는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보고했다. 남조선의 정세에 대해 논의했다. 종파주의자들이 대회를 소집했고, 2백명이 대회에 출석하였다. 대회에서 어떠한 문제들이 심의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신민당은 대회를 개최해공산당 지지자들을 모두 당에서 축출했다. 대회는 백남운을 위원장으로 하는 중앙위원회를 선출했다(9월26일)


▲로마넨코 보고. 서울에서 남조선신민당 조직부장 심운(沈雲)의 연락원이 도착했다. 신민당 중앙위원회의 다수는 백남운에게 사퇴를 요구했다. 백남운은 미군정과 경찰의 보호 하에  당 대회를 소집했는데, 대회에는 당에서 제명당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김두봉은 대회를 무효로 인정할 것과 부위원장 정노식(鄭魯湜)을 위원장으로, 허헌(許憲)을 부위원장으로 승인할 것을 제안했다(10월2일)


▲이그나치예프 대령(민정부 정치부 차장). 합당사업은 도 수준까지 진척되었고 지하에 정치위원회가 조직되었다(10월7일)


7. 스티코프비망록 3. 3당합당   ▶ 게 재 일 : 1995년 05월 16일 10面(40版)


박헌영파(朴憲永派)가 남로당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면서 수습 기미를 보였던 좌익 3당 합당은 10월16일 박헌영 중심의 합당에 반대하는 강진. 백남운 등이 독자적으로 반대파를 규합해 사회노동당(사로당)을 결성하면서 또 한 차례 폭풍에 휩싸이게 된다. 뜻밖의 사태전개에 당황한 蘇군정과 북로당은 남쪽 상황에 더욱 깊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스티코프비망록』은 이러한 개입의 사례들을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선 로마넨코와  김일성. 김두봉이 반대파의 대부격인 강진. 백남운을 각각 만나『왜 북조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가』를 추궁했다. 지금까지 반대파들이 북으로부터 비판당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蘇군정과 북로당의 호된 질책을 받은 백남운과 강진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사로당이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사로당 해체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11월1일 사로당은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백남운. 강진이 포함된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여운형. 강진. 백남운은 참석하지 않았다.


북로당 중앙위원회는 개별인물에 대한 비판 외에도 사로당을 공식 비판하는 결정서를 채택했다.


11월16일 북로당은 남로당 정치노선 절대지지와 강진등을 분열주의자로 규정하는「사로당에 관한 북로당의 결정서」를 발표했다. 이것은 蘇군정의 지지를 기대했던 사로당에는「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蘇군정의 입장이 강력하게 표명되자 사로당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이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간부들의 탈당성명이 잇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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