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晩書 작성일 : 2019-02-18 조회수 : 149
짜빈동 그 '신화창조의 날'

지난 15일은 청룡전우들 뿐 아니라 베트남 참전 전우들에겐 죽기 전에는,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짜빈동 승전일이다. 52년 전, 2.15. 여명이 밝아오는 그곳엔 능개비가 소리 없이 안개처럼 뿌려지고 있었다. 필자가 찾은 동작의 언덕 26묘역엔 능개비 같은 싸락눈이 쌓여가고 있었다. 짜빈동 전우회 장 김기홍 장군과 몇몇 안면이 있는 전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식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싸락눈이 제법 쌓여간다. 올라올 때 채명신 사령관 유택의 표지석 눈을 털어드리고 올라오면서, 또 하사관 학교 동기의 문패를 덮은 눈을 털어 주었는데, 눈은 그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식을 약식으로 끝내고 현충관으로 자리를 옮겨 정식으로 식을 이어 갈 계획이라는 설명과 함께 국민의례와 헌화를 마치고 현충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이 시작되기 전 정재성 전우가 급하게 달려온 듯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모든 인원이 자리를 잡고 분위기가 숙연해 지자 행사가 진행된다, 당시의 전투현장의 주인공들 초급장교에서 장군까지 오직 군인의 길을 걸어온 예비역 장군들, 현역 해병대 부사령관, 미 해병 사령관 등 그리고 그 때의 용사들, 유족들이 참석했는데, 지난해 서둘러 길고 긴 여행을 떠나신 우리의 영원한 캡틴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당시 11중대 화기소대장으로 신화의 중심에 있었던 김기홍 장군의 추도사(追悼辭)의 초안을 정리해 여기 글에 옮긴다. (주(注): 이 초안자(草案者)로서)

追悼辭
오늘 이 자리를 잊지 않고 찾아주신 유가족, 내빈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애국전우 여러분!
올해도 어김없이, 죽기 전에는 잊을 수 없는, 아니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영원한 그날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조국의 부름으로 남의 땅 이국의 전선에서 불멸의 해병 혼으로 신화를 창조한 우리들의 전우들이 머나먼 이국의 하늘 아래서 불꽃같이 산화하신지 반백년이 넘어 다시 두 해가 더 지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였던 우리의 조국은 격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 젊은 해병들을 죽음이 난무하는 이국의 전선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으로 찢어지는 가슴을 달래며 온 국민이 눈물로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내 나라 155마일 휴전선을 지켜야 했던 이 땅의 젊은이들은 국가의 부름이었기에, 조국의 지엄한 명령이었기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그렇게 기꺼이 이국의 떠나야 했습니다. 이른바 역사성 첫 해외파병입니다.

1966년 오늘 질식할 것 같던 전선에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베트남 쾅나이성 손틴군 짜빈동에서 신화의 서막은 시작되었습니다. 월맹 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이 중화기의 지원을 받으며 청룡11중대 방석을 기습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전장 속에 또 다른 아수라(阿修羅)장이었습니다. 그 지옥의 전투에서 우리는 아수라(阿修羅)처럼 싸웠습니다. 조국의 운명이 벼랑 끝으로 몰렸을 때 우리의 선배 해병들이 보여줬던‘귀신 잡는 해병’의 투혼이 그 전장의 해병들에게 또 다른 ‘신화를 창조’하면서 거듭나데 했습니다. 중대장을 중심으로 중대의 각 소대장, 분대장 그리고 대원들은 이미 완벽한 전투준비를 해놓은 상태였고, 어떠한 적의 기습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평소의 신념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3시간여의 사투(死鬪) 끝에 적243명 사살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과를 거두는 ‘신화를 창조’했습니다. 아 ~ 그러나 우리는 이 자리 동작의 언덕에 잠든 이 열 다섯 전우들을 조국의 이름으로 천상의 나라로 보내야 했습니다.

당시 이 전우들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소대장으로서 전우들을 보내야 하는 찢어지는 가슴의 상처는 반세기가 훌쩍 지나간 지금 이순간도 폐부를 찌르는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먼저 간 전우들에게 살아있는 우리 전우들은 평생을 죄인의 마음으로 그 날을 기억합니다.

전 대원 일 계급 특진이라는 명예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먼저 간 전우들을 위해 ‘전승비’조차 세우지 못하고 덧없이 반백년을 보내며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혼백이 떠나던 그곳이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된 타국이라는 점이 걸림돌이 되어‘전승비’니 ‘승전비’니 하는 말조차 쉽게 할 수 없는 것도 원인이 되겠습니다만 외신이‘신화(神話)를 남겼다.’라고 극찬했던 우리 전사(戰史)에길이 기록되어야 할 이 숨길 수 없는 역사가 이제 잊여져 가고 있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할 수 없습니다. 짜빈동 대첩이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사조차 축소되어 이렇게 옛 전우들만 모여서 조촐하게 그 날을 기억할 뿐 그 많은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은 외면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 앞에 아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그 때의 전우들은 반세기의 세월따라 늙어가고, 이 노병들이 천상의 전우들을 만나러 가고나면 짜빈동은 글자그대로 신화로만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으로 밤잠을 설치게 합니다. 끝으로

이 노병(老兵)에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남의 나라에 세울 수 없는 ‘승전비’라면 이 땅, 이동작의 짜빈동 묘역에라도 작고 아담한 ‘승전 탑’이라도 세우고 그 비(碑)에 열다섯 영웅들의 이름 석 자를 아로새겨 그 얼을 어루만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이름을 외치며 그들 곁으로 가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019년 2월15일 동작동 짜빈동 묘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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