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의 흐름 속에 명멸(明滅)해 간 충신, 열사가 그 얼마였던가? 금수강산 곳곳 골짜기 마다 이름 없는 민초로부터 병사에 이르기 까지, 그들이 뿌린 숭고한 붉은 피가 내(川)를 이루니 산천이 울고 초목도 통곡 하였어라. 그 피로 얼룩진 강산위에 세워진 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한 때, 오만한 객기로 스스로 애국자연 했던 젊은 날이 있었다. 자칭 세계평화와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의의 십자군’을 자처 하며 전장을 선도하던 젊은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돌아보면 참으로 부끄러운 젊은 시절의 객기(客氣)며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알게 또는 모르게 흔들려도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뒷방 늙은이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스스로를 질책할 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하는 슬픈 피에로의 자화상을 본다.
모두들 스스로 애국자임을 자처 하는데 나는 다만 열정이 넘치던 그 때의 나라사랑의 마음이 퇴색 되고 변질되어 감을 안타까워하는 것이 고작이니 누가 있어 애국자를 자처 하는가?
무력감과 함께 상실감으로 은둔 아닌 은둔으로, 칩거 아닌 칩거로 수많은 낯과 밤을 보냈던 2017년 하반기였다. 이런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육신과 정신이 황폐해 갈 수도 있다는, 그래서 폐인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전율했다.
역사의 물줄기를 크게 돌아 흐르게 했던 2017년이 저물어 간다. 가는 해를 아쉬워 하며, 그 젊은 날의 옛 전우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소주잔을 나누며 ‘작은 송년회’ 모임을 갖자는 J 전우의 제안은 지금의 무기력함이 너무 길어지면, 어쩌나 하는 절박감에 전전긍긍하던 나에겐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옛 전우들을 만나 다시 나를 찾는 실마리로 삼아야겠다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매서운 찬바람이 피부를 파고드는 사나운 추위 속을 헤치고 노병들이 하나, 둘 모인다.
한잔, 또 한잔 술잔이 거듭되면서 다시 가슴 저 아래에서 꿈틀대는 무엇인가를 느낀다. 무력감에서 깨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이 수렁 속에서 헤어나야 한다는 몸부림이 함께 익어가는 노병들의 추억담에서, 새봄에 발아를 준비하는 작은 씨앗이 되어 살아남을 느낀다. 몸과 마음이 상쾌해 진다.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기보다 훨씬 더 신선하다.
늘 보이던 몇몇 전우들이 건강상의 이유로 참석하지 못하고, 그나마 소주잔을 거침없이 나눌 수 있음이 곧 ‘건강의 척도’라니 또 그렇다고 답하며 웃을 수밖에,
전우 여러분 ! 2018년 우리 또 건강한 모습으로, 가내 두루두루 행복이 충만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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