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산과 물 작성일 : 2017-10-13 조회수 : 169
1971년. 서울-평양 왕래 합의 -12-


1971년. 서울-평양 왕래 합의 -12-

“최 동무도 이산가족 이 구만.”
“광복되고 6·25 전까지 서울에서 살았디.”

“어쩐지 말소리가 서울 말씨야. 서울 어느 학교에 다녔소?”
“내래 B고보를 다넸디.”

“좋은 학교 다녔네! 최 동무 집도 살 만했나 보지?”
“거럼, 우리 아버님이 위대한 분이시지.”

“뭘 한 분인데?”
“남조선에서 혁명운동을 했지.”
“남조선혁명? 그럼 빨갱이였구만?”

“거 동무는 삐뚤어졌구만. 말조심하라우.”

최수만 가족은 광복이 되고 얼마 후 평양으로 갔다고 한다.
그는 서울 B고보에 다닐 때 갖고 놀던 주름통 사진기를 갖고 평양에 간 것이 인연이 되어
북한 사진작가동맹에 가입했다.

그렇게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사진부에서 일을 하고 6·25전쟁 때는 보도일꾼으로
낙동강까지 내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죽음을 면했다.

평양을 거쳐 만주까지 도망을 다니면서 혼란 속에 다시 당에 복귀했다.
이런 공과로 최수만은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 무렵 북한 언론계도 김일성대 신문과를 나온 신진들이 장악하는 추세여서
신문사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성과 출신성분이 특출나야 했다.

그런데 최수만의 경우 당성은 어떻든 출신성분은 북한에서 배척하는 남한 출신임에 틀림없다.
전쟁 때 보도일꾼으로 일한 덕분에 출신성분이 가려져 있을 뿐이다.

“김 기자, 부탁이 하나 있는데.”
“뭔데,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주지.”

“다른 거 아니구, 거 낚싯바늘 좀 얻자꾸나.”
“그건 왜?”

“대동강에서 붕어 낚시를 하는데 그만 메기한테 낚시 바늘을 뗐디 뭐야.”
“붕어 낚시라면 보통강 쪽이 물이 흐르지 않아서 좋을 텐데.”

“김 기자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고향이 평양이라고 했잖아.”

“참 그렇티, 보통강은 물이 더러워 고기를 잡아도 먹지를 못하지.”
“낚는 재미지, 낚시꾼집 강아지도 붕어는 먹지 않는다던데.”

“아니야, 붕어는 지져 먹으면 조티. 다음 회담 때 좀 큰 걸루 갖다주면 안 되겠나?”
“아니, 북한은 강철공업이 남한보다 훨씬 발달했다더니 낚싯바늘이 없어?”

“낚싯바늘 만드는 공장이야 어디 있나.”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낚싯바늘을 구해서 고길 잡았어?

“강철 철사줄을 불에 달쿼서 줄칼로 쓸어 만들었디, 밤새 만든 낚싯바늘을 가물치,
메기에 떼키면 하늘이 노래지지. 그건 낚시꾼이 아니면 아무리 말해도 모를 거야.”

이런 일은 남북 기자들 간에 가끔 있는 일이었다. 물론 흔한 건 아니었지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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